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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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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달린 절벽에서 손을 뗄 수 있는가 · 1 / 6

타인의 인정은 왜 늘 적자처럼 느껴질까

읽기 전에

  • 인정받고 싶은 마음은 정말 버려야 할 결핍일까.
  • 타인의 반응이 없으면 내 노력도 무가치해지는 걸까.
  • 내 삶의 결재권을 다시 내게 가져오려면 무엇을 바꿔야 할까.

눈을 뜨면 가장 먼저 무엇을 하시나요? 습관적으로 스마트폰을 켜고 밤새 도착한 메시지나 SNS의 ‘좋아요’ 개수를 확인하지는 않으신가요? 우리는 하루를 시작함과 동시에 무의식적으로 거대한 ​‘마음의 계산기’​를 켜고 하루를 시작합니다.

“어제 내가 한 말에 부장님 기분이 상하지 않았을까? (손실 우려)”
“이 프로젝트를 성공시키면 동료들이 나를 능력 있다고 봐주겠지? (이익 기대)”
“오늘 입은 옷이 촌스럽게 보이면 어떡하지? (평판의 손실)”

마치 인생이라는 거대한 장부를 펴놓고, 매 순간 나의 행동이 타인에게 어떻게 비칠지, 그로 인해 내가 얻을 득과 실이 무엇인지를 따지는 회계사처럼 살아갑니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나요? 나에게 이득이 되는 방향으로 그토록 치열하게 계산하며 사는데, 정작 마음은 늘 허전하고 불안합니다. 왜냐하면 그 계산 방식이 틀렸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나의 만족’이 아니라 ‘타인의 반응’을 이익의 기준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적자를 볼 수밖에 없는 구조 속에 갇혀 있습니다.

오늘은 강신주 작가의 《무문관》을 통해, 우리를 끊임없이 눈치 보게 만드는 ​‘계산하는 마음’​의 정체를 파헤치고, ​적자 투성이인 인생 장부를 확실한 ‘흑자(이익)’로 전환하는 비밀​을 이야기해 보려 합니다.

1. 깃발이 움직이는가, 바람이 움직이는가 : 계산기가 고장 나는 순간

우리는 흔히 상황을 객관적으로 본다고 믿지만, 사실은 철저히 ​‘나의 이해관계’​라는 필터를 통해 세상을 봅니다.

《무문관》 29칙에는 아주 유명한 논쟁이 등장합니다. 어느 날 사찰의 깃발이 바람에 펄럭이는 것을 보고 두 스님이 언쟁을 벌입니다. 한 스님은 “깃발이 움직인다”고 하고, 다른 스님은 “바람이 움직인다”고 주장합니다.
이것을 우리의 ​‘이익과 손실’ 프레임​으로 가져와 볼까요?
“깃발이 움직인다”는 것은 내 눈앞에 벌어진 현상(결과)에 집착하는 마음입니다. “바람이 움직인다”는 것은 그 결과를 만든 외적 환경(원인)에 집착하는 마음입니다. 둘 다 내 마음 밖의 일입니다.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외부 상황을 두고 “이게 맞다, 저게 맞다” 계산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때 혜능 스님이 등장해 단칼에 정리합니다.
“바람이 움직이는 것도, 깃발이 움직이는 것도 아닙니다. 그대들의 마음이 움직이고 있을 뿐입니다.”

이 말은 무슨 뜻일까요? 저 깃발의 움직임이 나에게 시원한 바람(이익)인지, 내 머리를 헝클어뜨리는 귀찮은 바람(손실)인지, ​내 마음이 먼저 계산하고 요동쳤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팩트(Fact)를 보는 게 아니라, 그 팩트가 나에게 가져다줄 ​의미(Meaning)​를 계산하느라 바쁩니다.
“저 사람이 인상을 썼다(Fact)”를 보고 “나를 싫어하나?(Meaning/손실)”라고 해석하며 괴로워합니다.

이 계산법이 위험한 이유는 ​주도권이 ‘외부’에 있기 때문​입니다. 바람이 불지 않으면 깃발은 움직이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타인이 칭찬해주지 않으면 내 기분은 좋아지지 않습니다. 타인의 반응이라는 ‘외부 변수’에 내 행복(이익)을 맡겨놓았기 때문에, 우리는 늘 불안한 ‘손님’으로 살 수밖에 없습니다. 손님은 주인이 내오는 음식에 불평할 수는 있어도, 메뉴를 바꿀 권한은 없으니까요.

2. 인정받고 싶은 마음, 그 자체는 죄가 아니다

우리는 흔히 “인정 욕구를 버려라”, “남의 시선에 신경 쓰지 마라”는 조언을 듣습니다. 하지만 솔직해져 볼까요? 그게 가능합니까?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고, 누군가에게 가치 있는 사람으로 확인받고 싶은 욕망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본능입니다.

문제는 인정 욕구 자체가 아닙니다. 그 인정 욕구를 처리하는 ‘회계 방식’이 문제입니다.
《무문관》 10칙에는 ‘청세’라는 스님이 등장합니다. 그는 조산 스님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가난하고 고독합니다. 무언가 좀 베풀어 주십시오.”

청세 스님은 수행자로서 자신이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즉 ‘무소유’를 실천하고 있다고 자랑하고 싶었던 겁니다. 겉으로는 가르침을 구하는 척하지만, 속내는 ​“나 이렇게 수행 잘하고 있으니 칭찬(이익) 좀 해주세요”​라는 계산서를 내민 것입니다. 타인의 인정이라는 ‘입금’이 되어야만 자신의 수행이 가치 있다고 믿는, 전형적인 ​‘을(乙)의 마인드’​입니다.

그러자 조산 스님은 호통을 칩니다.
“이미 술을 세 잔이나 마셔놓고 입술도 안 적셨다고 하느냐!”

이 통찰이 핵심입니다. 너는 이미 수행을 통해 깨달음이라는 술을 마셨고(내적 성장), 그 취기(만족감)를 느끼고 있는데, 왜 또다시 남의 칭찬을 구걸하느냐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야근을 하며 프로젝트를 완성했습니다. 이때 우리는 두 가지 방식으로 계산할 수 있습니다.

  • 방식 A (손실의 프레임): “부장님이 칭찬 안 해주면 어쩌지? 내 고생은 누가 알아주나?” -> 타인의 반응이 없으면 나의 노력은 ‘비용(Loss)’으로 처리됩니다. 적자 인생입니다.
  • 방식 B (이익의 프레임): “부장님이 칭찬해주면 좋겠지만(덤), 안 해줘도 상관없어. 이 일을 하면서 나는 기획력을 길렀고(성장), 내 한계를 넘어서는 경험을 했으니까(만족). 난 이미 이득을 봤어.” -> 타인의 반응과 상관없이 나의 행동에 스스로 의미를 부여했으므로 이미 ‘이익(Profit)’이 확정되었습니다.

인정받고 싶은 마음을 부정하지 마세요. 대신 그 마음의 방향을 ‘타인의 결재’에서 ​‘나의 결재’​로 돌려야 합니다. 내가 나를 인정해 주면, 타인의 인정은 있으면 좋고 없어도 그만인 ‘보너스’가 됩니다. 이것이 바로 ​주인공의 셈법​입니다.

3. ‘착한 아이’가 아니라 ‘영리한 이기주의자’가 되어라

우리는 어릴 때부터 ‘착한 아이’가 되라고 교육받았습니다. 부모님의 말을 잘 들으면 칭찬(이익)을 받고, 어기면 꾸중(손실)을 듣는 메커니즘 속에서 자랐죠. 그래서 어른이 되어서도 타인의 욕망을 내 욕망인 척 착각하며 삽니다. 책에서는 이를 ​‘마마보이’​에 비유합니다.

마마보이는 겉보기엔 효자 같고, 연인에게는 섬세한 남자처럼 보입니다. 어머니(타인)의 눈치를 보는 데 이골이 났기 때문에 타인의 감정을 기가 막히게 캐치하거든요.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도 너랑 같은 생각이야. 그런데 어머니가 싫어하셔. 나를 좀 이해해 줘.”

이 말은 번역하면 이렇습니다. “네 마음도 중요하지만, 어머니(세상)의 뜻을 거스르면 내게 손해(불이익)가 오니까 어쩔 수 없어.”
그는 자신의 욕망보다 어머니라는 ‘주인’의 승인을 더 중요하게 계산합니다. 이것은 겉으로는 평화로워 보이지만 본질적으로는 ​‘노예의 삶’​입니다.

우리는 이제 ‘착한 아이’ 콤플렉스에서 벗어나, 조금 더 영리해져야 합니다. ​“행동의 의도를 의미화하여 이익으로 전환하는 것”​이 바로 그 열쇠입니다.
상사의 부당한 지시에 따를 때조차도, “어쩔 수 없이 끌려간다(손실)”고 생각하면 비참해지지만, “지금은 내가 조직 생활의 처세술을 익히는 과정이다(이익)”라고 의미를 부여하면 주도권은 나에게로 넘어옵니다.

내가 선택하고, 내가 의미를 부여하는 순간, 어떤 상황도 나에게 손해가 될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불교에서 말하는 ​‘수처작주(隨處作主)’​, 즉 ​‘머무르는 곳마다 주인이 된다’​는 말의 진짜 의미입니다. 주인이 되면 내가 서 있는 그곳이 모두 참된 곳(입처개진)이 됩니다. 내가 선택했으니 억울할 것이 없고, 억울하지 않으니 고통스럽지 않습니다.

4. 매일 아침, 거울 속의 자신에게 ‘결재’를 올려라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 계산법을 바꿀 수 있을까요?
《무문관》 12칙의 주인공인 서암 스님은 매일 아침 기이한 행동을 했습니다. 그는 스스로를 큰 소리로 불렀습니다.

“주인공아!”
그리고는 스스로 대답했습니다.
“예!”
“깨어 있어야 한다! 남에게 속지 마라!”

이것은 매일 아침 자신에게 올리는 ​‘결재 서류’​와 같습니다.
“오늘 하루, 타인의 시선이나 세상의 기준(남)에게 속아 너의 기분과 행복을 헐값에 넘기지 마라. 네 기분의 결재권자는 오직 너다.”

이익과 손실의 기준을 ‘나’로 가져오는 것. 이것은 이기적인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내가 내 삶의 주인으로 단단히 서야만, 타인의 인정에 목매지 않고 타인에게 진정한 친절(보시)을 베풀 수 있습니다. 내가 가진 것이 넘쳐야 남에게 줄 수 있듯이, 내가 나를 먼저 인정해 주어야(내적 이익), 타인에게도 너그러워질 수 있는 법입니다.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인생이라는 장부에 ‘타인의 인정’, ‘사회의 기준’, ‘미래의 불안’ 같은 항목들로 빼곡히 채워 넣느라 정작 ‘나’라는 항목을 누락시켜 왔습니다.
이제 계산기를 다시 두드리십시오.
“내가 하고 싶어서 했다.”
“그 과정에서 나는 배웠다.”
“그래서 나는 이득을 보았다.”

이 세 문장이면 충분합니다. 타인이 뭐라 하든, 결과가 어떻든, 당신은 이미 남는 장사를 한 것입니다.

오늘의 질문

당신은 오늘 하루, 타인의 칭찬을 듣기 위해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한 적이 있나요? 반대로, 아무도 알아주지 않더라도 ‘내가 하고 싶어서’ 했던 일은 무엇인가요? 그 일에 어떤 ‘이익(의미)’의 이름을 붙여주시겠습니까?

출발점이 된 책
강신주, 『매달린 절벽에서 손을 뗄 수 있는가? : 무문관, 나와 마주 서는 48개의 질문』, 동녘, 2014. 이 글은 책과 『무문관』의 화두에서 출발한 설탕바른위로의 재해석이다. 책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