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줄 직접답변
- 왜 우리는 이미 가진 것을 놓지 못한 채 더 위태로워질까.
- 내가 쥐고 있는 것은 안전망일까, 족쇄일까.
- 상실을 선택으로 다시 읽는 순간 무엇이 달라질까.
매달린 절벽에서 손을 뗄 수 있는가 · 2화
우리는 지난 1부에서, 타인의 인정과 세상의 기준에 맞춰 사느라 정작 '나'를 잃어버리는 삶이 얼마나 거대한 '적자(Deficit)'인지 확인했습니다. 타인의 반응을 기다리는 '대기자'의 삶을 청산하고, 내가 내 행동에 의미를 부여하는 '결재권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 그것이 바로 주인공으로 사는 첫걸음이었습니다.
하지만 머리로는 알아도 몸은 주저합니다. 계산기를 던져버리고 내 멋대로 살겠다고 다짐하는 순간, 덜컥 겁이 나기 때문입니다.
"이걸 놓으면 추락하지 않을까?"
"지금까지 쌓아올린 평판과 안정(이익)이 다 무너지는 건 아닐까?"
우리는 본능적으로 손실을 죽음처럼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손해 보지 않기 위해 아등바등 지금 쥐고 있는 것을 더 꽉 움켜쥡니다. 그런데 강신주 작가는 《무문관》을 통해 우리에게 섬뜩한 제안을 합니다. "살고 싶다면, 쥐고 있는 그 손을 놓아라."
오늘은 이 역설적인 주문, 불교에서 말하는 '방하착(放下着, 내려놓음)'이 왜 단순한 포기(손실)가 아니라, 내 인생의 주도권을 되찾는 가장 확실한 '이익(Profit)'인지, 그 비밀을 파헤쳐 보려 합니다.
1. 성공의 꼭대기는 왜 '감옥'이 되는가 : 100척 대나무의 딜레마
우리는 누구나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려 합니다. 승진, 재산, 명예… 남들보다 더 높은 위치에 오르면 더 많은 자유와 행복(이익)이 기다릴 거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안간힘을 써서 마침내 남들이 부러워하는 위치, 혹은 내가 목표했던 지점에 도달했다고 칩시다. 불교에서는 이 상태를 '백척간두(百尺竿頭)'라고 부릅니다. 100척이나 되는 까마득한 대나무 꼭대기에 서 있다는 뜻입니다.
《무문관》 46칙에서 석상 스님은 묻습니다.
"100척이나 되는 대나무 꼭대기에서 어떻게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겠는가!"
상상해 보세요. 30미터 상공의 흔들리는 대나무 끝에 간신히 발을 붙이고 서 있습니다. 오르기는 힘들었지만, 막상 오르고 나니 그곳은 영광의 자리가 아니라 공포의 자리입니다. 내려갈 수도 없고, 머물러 있자니 위태롭습니다.
우리는 '이익'을 얻기 위해 그곳에 올랐습니다. "이 정도 직급이면, 이 정도 돈이면 행복하겠지." 하지만 막상 그 자리에 서면, 우리는 그것을 지키기 위해(손실을 막기 위해) 꼼짝달싹 못 하는 처지가 됩니다.
"내가 어떻게 올라온 자리인데."
"지금 이걸 놓으면 나는 끝장이야."
자신의 성취가, 자신이 쌓아올린 이미지가 오히려 족쇄가 되어 나를 가둡니다. 자신을 지키려는 그 마음(자기애)이 가장 강력한 집착이 되어,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것입니다. 더 이상 올라갈 곳도 없고, 내려오자니 추락인 상황. 이것이 바로 '성공한 사람들이 겪는 적자'입니다.
여기서 석상 스님은 충격적인 해법을 제시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라(진일보, 進一步)."
허공으로 한 발을 내딛으라는 말입니다. 상식적인 계산기로 두드려보면 이것은 명백한 '추락'이자 '죽음'입니다. 나의 모든 자산을 잃는 '손실'의 극치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이익 프레임'으로 다시 계산해 봅시다.
내가 저 대나무 꼭대기에 매달려 벌벌 떨고 있는 것은 상황의 '노예'가 된 것입니다. 하지만 내가 스스로 한 발을 내딛는 순간, 나는 중력에 몸을 맡기는 '주인'이 됩니다. "떨어지는 것을 내가 선택했다"는 이 주체적 의지야말로, 공포를 자유로 바꾸는 거대한 이익입니다.
2. 입에 문 나뭇가지 : 변명하지 않을 때 생기는 힘
우리가 쥐고 있는 것은 지위나 돈뿐만이 아닙니다. 우리는 '내 생각', '내 자존심', '내가 옳다는 믿음'을 생명줄처럼 입에 꽉 물고 살아갑니다.
《무문관》 5칙 '향엄상수'에는 기가 막힌 상황극이 등장합니다.
한 사람이 높은 나무에 매달려 있습니다. 손으로 가지를 잡은 것도 아니고, 발로 밟은 것도 아닙니다. 오직 입으로 나뭇가지를 꽉 물고 매달려 있습니다.
그때 나무 밑에서 누군가 묻습니다. "불교의 진리가 무엇입니까?(달마가 서쪽에서 온 까닭은?)"
자, 계산기를 두드려 봅시다.
대답을 안 하자니(침묵), 진리를 묻는 사람을 무시하는 것이라 도리에 어긋납니다(도덕적 손실).
대답을 하려고 입을 열면(말), 입에 문 가지를 놓치게 되어 떨어져 죽습니다(생물학적 손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이 상황,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지 않나요? 바로 우리의 일상입니다. 우리는 입으로(말로, 논리로, 자존심으로) 세상을 버티고 있습니다. "내가 맞고 네가 틀렸어", "내 방식이 효율적이야." 이 알량한 자기주장을 입에 물고, 그것이 나를 지탱해 준다고 믿습니다. 누군가 나를 비난하면 우리는 화를 냅니다. 입에 문 가지(자아)가 흔들리기 때문입니다. 입을 열어 변명하자니 구차해 보이고(추락), 가만히 있자니 바보 취급 당하는 것 같습니다(무시).
이 화두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입을 여는 용기'입니다. 즉, 내가 살려고 아등바등 물고 있던 그 나뭇가지(고집, 이론, 자존심)를 놓아버리라는 것입니다. 떨어져 죽으라는 말이냐고요?
아닙니다. 내가 쥐고 있는 그 '말(논리/변명)'을 놓아버려야, 비로소 '진짜 삶(땅)'에 발을 디딜 수 있다는 뜻입니다.
입에 문 가지를 놓는 순간 추락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허공에 매달린 위태로운 삶을 끝내고 단단한 대지 위에 두 발로 서는 것입니다. 변명하지 않고, 내 논리를 고집하지 않고, 쿨하게 "그래, 네 말이 맞을 수도 있어"라고 놓아버리는 순간, 우리는 논쟁에서 지는 것(손실) 같지만 사실은 그 상황을 지배하는 여유(이익)를 얻게 됩니다.
3. '무(無)'라는 파괴적인 망치 : 있다와 없다의 장부 태우기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우리 마음속 계산기를 어떻게 꺼야 할까요? 우리를 가장 괴롭히는 것은 끊임없이 '있다(이익)'와 '없다(손실)'를 따지는 이분법적 사고입니다. 이 장부를 박살 내는 가장 강력한 무기가 바로 조주 스님의 '무(無)'입니다.
《무문관》 1칙에서 어떤 스님이 조주에게 묻습니다. "개에게도 불성(부처의 성품)이 있습니까?"
상식적으로 불교에서는 모든 생명에게 불성이 있다고 하니 "있다(有)"가 정답일 겁니다. 혹은 개 같은 축생에게 무슨 불성이냐며 "없다(無)"고 할 수도 있겠지요. 질문한 스님은 이분법의 답을 기대하며 계산기를 들이민 겁니다.
그런데 조주는 단칼에 잘라 말합니다. "무(無)!"
이 '무'는 단순히 "없다(Nothing)"는 뜻이 아닙니다. "네가 가진 '있다/없다'라는 질문 자체가 틀렸다", "그 따위 계산 집어치워라"라는 일갈입니다. 조주는 질문자의 머릿속에 있는 '업식성(따지고 계산하는 습관)'을 부수려 한 것입니다.
우리는 늘 이분법에 갇혀 삽니다.
"돈이 있다/없다."
"능력이 있다/없다."
"사랑받는다/못 받는다."
이 프레임에 갇히면, '있음'은 기쁨(이익)이 되고 '없음'은 슬픔(손실)이 됩니다.
조주의 '무'는 이 프레임 자체를 무효화시키는 선언입니다. "네가 생각하는 그 기준, 그 의미, 그 가치평가를 싹 다 지워라."
내가 가진 것이 '없어질까 봐' 전전긍긍하는 마음,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이 '있어야 하는데'라고 갈망하는 마음. 이 두 가지 마음을 '무'로 돌려보낼 때, 우리는 비로소 자유로워집니다.
이것은 '손실'이 아닙니다. '평가'라는 무거운 짐을 내려놓는 엄청난 '이익'입니다. 개에게 불성이 있든 없든 개는 꼬리를 흔들며 잘만 사는데, 인간만이 그것을 따지느라 머리가 빠집니다. 그 쓸데없는 계산 노동을 멈추는 것, 그것이 바로 '무'의 지혜입니다.
4. 죽어야 사는 역설 : 나는 내가 생각하지 않는 곳에서 존재한다
벼랑 끝에서 손을 놓는 것(방하착), 입에 문 나뭇가지를 놓는 것, 있다와 없다의 분별을 놓는 것.
이 모든 것은 우리에게 직관적으로 '손실'처럼 느껴집니다. 내가 쌓아온 경력, 자존심, 논리를 포기하는 것이니까요. 하지만 이것은 '가짜 나(Ego)'의 손실일 뿐, '진짜 나(Self)'에게는 최대의 기회입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라캉은 "나는 내가 생각하지 않는 곳에서 존재한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나는 이런 사람이야", "나는 이걸 가져야 해"라고 머리로 생각하며 꽉 쥐고 있는 그곳에는, 역설적으로 진짜 '나'가 없습니다. 거긴 타인의 시선과 욕망, 그리고 계산기만 있을 뿐입니다.
오히려 그 생각을 놓고, 계산을 멈추고, 멍하니 창밖을 보거나, 누군가를 위해 무심코 손을 내밀 때, 그 '생각 없는 곳(무반성적 의식)'에서 진짜 생생한 내가 튀어나옵니다.
100척 간두에서 손을 놓는 순간, 우리는 추락하는 것이 아니라 비로소 중력의 법칙에 몸을 맡기는 자유를 얻습니다. 내 힘으로 버티려는 아집을 버리고, 세상의 흐름(연기)에 나를 던지는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나 혼자만의 좁은 대나무 꼭대기가 아니라, 광활한 대지(시방세계) 전체를 나의 무대로 삼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의도의 긍정적 전환'입니다.
"내가 쫓겨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좁은 곳을 박차고 넓은 곳으로 나가는 것이다."
"내가 말을 못 해서 침묵하는 것이 아니다. 말로 할 수 없는 진실을 위해 침묵을 선택한 것이다."
나의 행동에 '어쩔 수 없음(수동)'이 아니라 '선택(능동)'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순간, 모든 상실은 새로운 획득이 됩니다.
5. 당신은 오늘 무엇을 놓아버리겠습니까?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쥐고 있느라, 정작 중요한 것을 잡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타인의 인정이라는 썩은 동아줄, 과거의 영광이라는 무거운 돌덩이, 미래의 불안이라는 가시 돋친 나뭇가지.
이것들이 나를 지탱해 준다고 믿지만, 사실은 이것들이 나를 꼼짝 못 하게 묶어두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조주 스님은 말합니다. "개를 보라. 개는 불성이 있네 없네 따지지 않고 밥을 먹고 잠을 잔다."
생각의 군더더기, 의미 부여의 과잉, 손익 계산의 피로감을 '무(無)'의 쓰레기통에 던져 버리세요.
손을 펴면, 쥐고 있던 것은 떨어집니다. 하지만 빈손이 되어야만, 우리는 비로소 새로운 삶을, 진짜 내 삶을 움켜쥘 수 있습니다.
떨어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세요.
당신이 쥐고 있던 그것은, 사실 당신을 날지 못하게 붙잡고 있던 족쇄였을지도 모릅니다. 족쇄를 잃어버리는 것은 '손실'이 아니라 '해방'입니다.
오늘의 질문
당신이 지금 "이것만은 절대 놓을 수 없어"라고 생각하며 꽉 쥐고 있는, 당신을 가장 힘들게 하는 '나뭇가지'는 무엇인가요? 그것을 놓으면 정말로 당신의 인생이 끝장날까요, 아니면 당신을 옭아매던 줄이 끊어질까요?
출발점이 된 책
강신주, 『매달린 절벽에서 손을 뗄 수 있는가? : 무문관, 나와 마주 서는 48개의 질문』, 동녘, 2014. 이 글은 책과 『무문관』의 화두에서 출발한 설탕바른위로의 재해석이다. 책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