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줄 직접답변
- 남들이 가는 길을 따르면 정말 덜 불안해질까.
- 왜 검증된 정답은 때때로 내 삶의 표절이 되는가.
- 나만의 선택은 어떻게 실험이 아니라 삶이 될까.
매달린 절벽에서 손을 뗄 수 있는가 · 3화
지난 시간, 우리는 아찔한 100척 대나무 꼭대기에서 손을 놓는 상상을 했습니다. 계산기를 던지고, 내가 쥐고 있던 알량한 자존심과 지위를 놓아버리는 '방하착(放下着)'의 순간이었죠.
자, 이제 쿵 하고 바닥에 떨어졌습니다. 죽었을까요? 아닙니다. 우리는 두 발로 단단한 대지 위에 섰습니다. 그런데 막상 내려와 보니 세상은 여전히 시끄럽습니다. 사방에서 "이리로 가야 이익이다", "저렇게 하면 손해 본다"라며 정답들이 쏟아집니다. 부모님의 잔소리, 자기계발서의 충고, 직장 상사의 명령… 이 수많은 '세상의 정답'들 앞에서 우리는 다시금 흔들립니다.
강신주 작가는 《무문관》과 니체의 철학을 빌려, 떨어진 그곳에서 우리가 취해야 할 태도를 "사자처럼 포효하고, 어린아이처럼 춤추라"고 말합니다. 오늘은 남들이 만들어놓은 '이익의 길(매뉴얼)'을 거부하고, 손해를 감수하더라도 나만의 '오솔길'을 만드는 창조적인 삶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내 인생 장부에서 가장 큰 이익, 즉 '자기다움'을 남기는 비결이기 때문입니다.
1. 흉내 내기는 '남는 장사'일까? : 구지 스님의 칼
우리는 불안할 때 가장 쉬운 선택을 합니다. 바로 '남들 따라 하기'입니다. 남들이 다 사는 주식을 사고, 남들이 좋다는 여행지를 가고, 남들이 부러워하는 직업을 갖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검증된 이익'을 보장해 줄 것 같기 때문입니다. 실패할 확률(손실)을 줄이는 가장 안전한 방법은 '모방'이니까요.
하지만 선불교에서는 이 '안전한 모방'을 가장 경계합니다. 《무문관》 3칙에는 섬뜩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구지(俱胝)'라는 스님은 누가 도(道)를 물으면 말없이 손가락 하나를 세워 보였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사람들은 깨달음을 얻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구지 스님의 시중을 들던 어린 동자승이 이를 흉내 내기 시작합니다. 손님이 "스승님은 어떤 법을 설하시니?"라고 묻자, 동자도 똑같이 손가락을 세워 보인 것이죠.
이 사실을 안 구지 스님은 동자를 불러 칼로 그 손가락을 잘라 버립니다. 피를 흘리며 울부짖는 동자가 문밖으로 나가려 하자 스님이 다시 부릅니다. 동자가 고개를 돌리자 스님은 다시 손가락을 세워 보였고, 동자는 그제야 깨닫습니다.
잔혹해 보이지만, 이 이야기의 핵심은 "남의 정답(이익)을 훔치지 마라"는 것입니다. 동자가 손가락을 세운 건 자신의 깨달음이 아니라, 스승의 권위를 빌려 '도인 흉내'를 낸 것뿐입니다. 이것은 내 인생을 사는 게 아니라, 타인의 인생을 '표절'하는 것입니다. 표절은 쉽고 안전합니다(이익). 하지만 그 대가로 우리는 '진짜 나(본래면목)'를 잃어버리는 치명적인 손실을 입습니다.
강신주 작가는 이를 두고 "앵무새가 되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남의 명언, 남의 성공 방식을 달달 외워서 앵무새처럼 떠드는 삶은, 겉보기엔 화려해 보여도 속은 텅 비어 있습니다. 손가락이 잘리는 고통(기존 세계의 파괴)을 겪어야만, 우리는 비로소 남의 것을 흉내 내던 가짜 손가락을 버리고, '나만의 손가락'을 세울 수 있습니다. 내가 직접 경험하고 느낀 것만이 진짜 내 자산(이익)입니다. 남의 것을 베껴 얻은 100점보다, 내 힘으로 푼 50점이 내 인생 장부에는 더 큰 흑자로 기록됩니다.
2. 규칙을 따르는 '낙타' vs 규칙을 만드는 '사자'
우리는 왜 자꾸 남을 흉내 내고, 세상이 정해준 규칙에 목를 맬까요? 그것이 '손해 보지 않는 길'이라고 배웠기 때문입니다. 니체는 이런 단계를 '낙타'의 정신이라고 불렀습니다. 낙타는 주인이 짐을 실으면 싣는 대로, 가라면 가라는 대로 묵묵히 사막을 건넙니다. "너는 마땅히 해야 한다(Thou shalt)"라는 명령에 복종하는 삶입니다. 학교에서는 모범생, 회사에서는 예스맨이 되는 것이죠. 이것은 분명 '생존의 이익'을 줍니다.
하지만 주인공이 되려면 우리는 낙타에서 '사자'로 변신해야 합니다. 사자는 거친 황야의 주인입니다. 사자는 남이 주는 먹이를 받아먹지 않고, 스스로 사냥합니다. 사자의 정신은 "나는 하고자 한다(I will)"입니다. 세상이 "이게 정답이야(이익)"라고 강요할 때, 사자는 "아니, 그건 네 생각이고!"라며 으르렁거립니다.
《무문관》 40칙에서 위산 스님은 스승이 놓은 물병을 발로 걷어차 버립니다. "물병이라고 불러서도 안 되고, 아니라고 해서도 안 된다"는 딜레마(규칙)를 스승이 제시했을 때, 수제자는 머리를 굴리며 정답을 찾으려 애썼습니다. 하지만 위산은 그 규칙(시험) 자체를 거부하고 물병을 차버리고 나가버렸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자의 포효'입니다.
기존의 질서, 권위, 관습이라는 틀을 깨부수는 것. 이것은 사회적으로 보면 '반항아'로 찍히는 손실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내 영혼의 관점에서는 '타인의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는 가장 큰 이익입니다. 위산 스님은 시험을 잘 봐서 점수(이익)를 따려 하지 않았습니다. 시험 자체를 걷어차버림으로써, 채점관인 스승마저 자신의 관객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이것이 바로 '을'에서 '갑'으로, '손님'에서 '주인'으로 전환하는 순간입니다.
3. 머리에 신발을 얹는 자유 : 심각함을 깨부수는 '어린아이'의 춤
사자처럼 기존의 가치를 파괴했다면, 그다음은 무엇일까요? 매일 으르렁거리고 싸우기만 할 수는 없습니다. 파괴가 끝난 자리에는 새로운 창조가 필요합니다. 이때 필요한 것이 바로 '어린아이'의 마음입니다.
아이는 규칙을 따르지도(낙타), 규칙과 싸우지도(사자) 않습니다. 아이는 그저 '자기만의 놀이'를 합니다. 모래성을 쌓았다가 부수고, 다시 그림을 그립니다. 거기에는 "이걸 잘해서 칭찬받아야지(이익)"라거나 "못하면 혼나겠지(손실)"라는 계산이 없습니다. 그저 행위 그 자체에 몰입하여 즐길 뿐입니다. 이것이 바로 니체가 말한 '성스러운 긍정'이자, 선불교에서 말하는 '유희삼매(遊戱三昧)'입니다.
자, 여기 아주 황당하고 기괴한 사건이 하나 있습니다. 《무문관》 14칙에 나오는 '남전참묘(남전 스님이 고양이를 베다)'라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규칙에 갇힌 어른'과 '규칙을 가지고 노는 아이'의 결정적 차이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건은 이렇습니다. 어느 날 절에서 동쪽 방 스님들과 서쪽 방 스님들이 고양이 한 마리를 두고 서로 자기 것이라며 멱살잡이를 하고 싸웠습니다. 시끄러운 소리에 나온 남전 스님은 고양이를 번쩍 들어 올리며 칼을 겨누고 소리칩니다.
"너희들이 바른 말을 한마디 하면 살려주고, 못 하면 베어 버리겠다!"
이 절체절명의 순간, 스님들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습니다. 왜일까요? 그들은 '상식과 규칙'에 갇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머릿속은 복잡했습니다.
"살생은 나쁜 건데 스님이 저래도 되나?"
"원래 고양이는 우리 방 것인데 뭐라고 말해야 돌려받지?"
그들은 너무나 '심각'했습니다. '생명 존중'이라는 도덕, '소유권'이라는 규칙, '스승의 위엄'이라는 권위… 이 모든 기존의 정답(규정적 판단)을 검색하느라 아무 말도 못한 것입니다. 결국 고양이는 베어졌습니다. 분위기는 그야말로 초상집이 되었죠.
저녁에 외출했다 돌아온 조주 스님이 이 끔찍하고 무거운 이야기를 전해 들었습니다. 이야기를 다 들은 조주는 어떻게 했을까요?
그는 갑자기 신고 있던 짚신을 벗더니, 그걸 자기 머리 위에 얹고는 휑하니 밖으로 나가버렸습니다.
이 모습을 본 남전 스님은 무릎을 치며 탄식합니다.
"아, 낮에 네가 있었더라면 고양이를 살렸을 텐데!"
도대체 이게 무슨 뜻일까요? 신발을 머리에 얹는 '미친 짓'이 어떻게 고양이를 살린다는 말일까요? 여기서 인과관계를 다시 따져봅시다.
첫째, '심각함'을 비웃는 행위입니다.
스님들이 다툰 이유는 고양이를 '심각하게' 소유하려 했기 때문이고, 남전이 고양이를 벤 것은 그 심각한 집착을 깨기 위해서였습니다. 조주는 신발을 머리에 얹음으로써 이 모든 상황을 '우스꽝스러운 코미디'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스님들, 고작 고양이 한 마리 때문에 싸우고, 죽이고, 아주 난리들이 났군요. 신발을 머리에 쓰는 꼴처럼 아주 거꾸로 돌아가는 세상입니다!"
그는 온몸으로 기존의 질서(신발=발, 고양이=소유물)를 비틀어버린 것입니다.
둘째, '정해진 용도'를 파괴하는 창조성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은 "신발은 발에 신는 것"이라는 규칙(매뉴얼)을 따릅니다. 이것이 칸트가 말한 '규정적 판단(노예의 사고)'입니다. 하지만 조주는 그 규칙을 무시했습니다. "신발? 내가 머리에 쓰고 싶으면 모자가 되는 거지!"
이것이 바로 '반성적 판단(주인의 사고)'입니다. 남이 정해준 용도에 얽매이지 않고, 내가 즉석에서 새로운 규칙을 만드는 것입니다.
만약 그 자리에 조주가 있어서 신발을 머리에 얹고 춤이라도 췄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살벌했던 분위기는 순식간에 와장창 깨졌을 겁니다. "푸하하, 저게 무슨 짓이야?" 하며 스님들은 긴장을 풀고 웃음을 터뜨렸을지도 모릅니다. 그 유쾌한 파격 속에서 고양이를 베려던 살의(殺意)도, 고양이를 차지하려던 집착도 힘을 잃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심각하게 사는 이유는 '실패하면 손해'라는 강박 때문입니다. 하지만 어린아이는 넘어지는 것을 실패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저 놀이의 일부일 뿐입니다. 남전 스님의 제자들은 정답을 찾으려다 얼어붙었습니다. 하지만 조주 스님은 '어린아이'처럼 행동했습니다. 아이들은 밥그릇을 모자로 쓰고, 빗자루를 말(馬)이라고 타고 놉니다. 거기엔 "이게 맞나?"라는 계산이 없습니다. 그저 그 순간의 놀이가 있을 뿐입니다.
심각해지지 마십시오. 심각해지면 지는 겁니다.
세상이 정해준 규칙(신발은 발에!)을 따르느라 쩔쩔매지 말고, 조주처럼 신발을 머리에 얹을 수 있는 '뻔뻔한 유머'와 '자유로운 파격'을 가지십시오. 그 예측 불가능한 자유가 당신을, 그리고 당신 주변의 숨 막히는 공기를 살려낼 것입니다.
4. 1보를 걷지 않는 자의 백일몽 : 관념의 유희를 멈춰라
하지만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종종 머릿속으로만 사자 흉내를 내고, 어린아이 흉내를 냅니다.
"나도 회사 때려치우고 여행이나 갈까?" (상상 속의 사자)
"다 부질없어. 그냥 즐기며 살아야지." (상상 속의 아이)
행동하지 않으면서 말로만 자유를 떠드는 것, 이것은 '관념의 유희'일 뿐입니다.
벤야민은 "1보를 걷지 않으면서 2보, 3보, n\+1보를 꿈꾸는 것은 백일몽"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1보를 걷는 수고(손실)는 피하고, n\+1보에 도달했을 때의 달콤함(이익)만 상상하며 시간을 낭비합니다.
《무문관》 16칙에서 운문 스님은 "세계는 이렇게 넓은데, 왜 종이 울리면 가사를 입고 법당에 갇히는가?"라고 묻습니다. 생각으로는 자유를 외치면서(세계는 넓다), 몸은 여전히 습관처럼 종소리에 반응하는(가사를 입는) 우리의 모순을 꼬집는 것입니다.
진짜 어린아이는 "놀고 싶다"고 생각만 하지 않습니다. 당장 흙탕물에 뛰어듭니다. 진짜 사자는 "싸우고 싶다"고 말만 하지 않습니다. 당장 먹이를 향해 달려듭니다. 자유는 머릿속 계산이 끝났을 때 오는 것이 아니라, 내 몸이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움직일 때 비로소 시작됩니다. 등산 지도를 아무리 봐도 다리 근육은 생기지 않습니다. 직접 산을 올라야 합니다. 계산기만 두드리며 '가상의 이익'을 꿈꾸지 말고, 서툴더라도 내 발로 걷는 '현실의 한 걸음'을 떼십시오. 그 한 걸음이 진짜 내 자산입니다.
5. 당신만의 춤을 추고 있나요?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남의 춤'을 춰왔습니다. 부모님이 원해서, 세상이 좋다고 해서, 남들이 다 하니까… 억지로 박자를 맞추느라 내 발은 퉁퉁 붓고 표정은 굳어버렸습니다. 그건 춤이 아니라 '노동'이고 '고역'입니다.
이제 음악을 바꾸세요. 세상이 틀어주는 행진곡(규칙)을 끄고, 내 심장이 뛰는 리듬에 귀를 기울이세요. 그 리듬이 엉성해도 괜찮습니다. 남들이 비웃어도 상관없습니다.
남들이 가는 길(고속도로)은 빠르고 편해 보이지만(이익), 그곳엔 '나'가 없습니다. 반면 내가 낫으로 풀을 베며 만드는 오솔길은 느리고 험하지만(손실), 그 길 위에는 온전히 '나'가 있습니다.
사자처럼 남의 시선을 찢어버리고, 어린아이처럼 낄낄대며, 당신만의 스텝을 밟으세요.
이익과 손실을 따지며 쭈뼛거리지 말고, 지금 당장 무대 위로 뛰어올라가세요.
"틀리면 어때? 망하면 어때? 이게 나인데!"
이 배짱이 당신을 세상의 들러리가 아닌, 단독 주연 배우로 만들어 줄 것입니다. 당신의 행동에 당신이 의미를 부여하면, 그것은 그 자체로 이미 성공한 인생(이익)입니다.
오늘의 질문
당신은 지금 '남들이 보기에 좋은 삶'을 살고 있나요, 아니면 '내가 보기에 즐거운 삶'을 살고 있나요? 당신이 세상의 눈치(규칙) 때문에 억누르고 있는 당신만의 '장난기'나 '본능'은 무엇인가요?
출발점이 된 책
강신주, 『매달린 절벽에서 손을 뗄 수 있는가? : 무문관, 나와 마주 서는 48개의 질문』, 동녘, 2014. 이 글은 책과 『무문관』의 화두에서 출발한 설탕바른위로의 재해석이다. 책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