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가 이기심이 되지 않으려면

3줄 직접답변

  • 내 선택을 지키는 일과 타인을 밀어내는 일은 어디서 갈라질까.
  • 왜 자유에는 늘 더러운 손의 책임이 따라붙을까.
  • 관계 안에서 주인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매달린 절벽에서 손을 뗄 수 있는가 · 4화

지난 시간, 우리는 남들의 시선과 규칙이라는 무거운 짐을 벗어던지고 '어린아이'처럼 춤추는 자유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남들이 뭐라든 나는 나야!"라고 외치며 나만의 스텝을 밟는 그 순간, 세상은 더 이상 감옥이 아니라 놀이터가 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 완벽해 보이는 자유에도 치명적인 함정이 숨어 있습니다. 바로 ​'고독'​입니다. 혼자서 춤을 추다 문득 옆을 돌아보니 아무도 없습니다. 나만 자유롭고, 나만 행복하고, 나만 편안합니다. 친구는 야근에 시달리고, 가족은 병마와 싸우고, 연인은 취업난에 괴로워하는데, 나 혼자 산꼭대기에서 "야호, 나는 자유다!"라고 외친다면, 그것은 진정한 자유일까요, 아니면 ​'눈치 없는 이기심'​일까요?

강신주 작가는 《무문관》을 통해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혼자만 깨달은 자는 반쪽짜리다. 진짜 주인공은 진흙탕 속으로 뛰어든다."
오늘은 나의 자유(이익)를 지키면서도 타인의 고통(손실)을 외면하지 않는, 가장 어렵지만 가장 아름다운 ​'사랑의 기술'​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 합니다. 이것은 타인을 위해 나를 희생하는 '손실'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히려 나의 자유를 타인에게까지 확장하여 내 우주를 넓히는, 가장 거대한 ​'이익'​의 이야기입니다.

1. 100척 대나무 꼭대기에서 내려오는 '손해'를 감수하라

우리는 2부에서 '백척간두(百尺竿頭)' 이야기를 했습니다. 100척이나 되는 까마득한 대나무 꼭대기는 일체의 번뇌와 집착이 사라진 '깨달음의 정점'을 상징합니다. 그곳은 고요하고 평화롭습니다. 세상의 시끄러운 소음도, 골치 아픈 인간관계도 없는 청정 구역입니다. '나'라는 존재의 독립성을 완성한 ​최고의 이익 구간​이죠.

그런데 《무문관》 46칙에서 석상 스님은 황당한 요구를 합니다.
"100척간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라(진일보, 進一步)."

대나무 꼭대기에서 한 걸음을 더 내딛으면 어떻게 될까요? 당연히 떨어집니다. 어디로 떨어질까요? 다시 우리가 그토록 지긋지긋해하며 탈출했던 저 시끄러운 세상, ​'시방세계(十方世界)'​의 한복판으로 곤두박질칩니다.
계산기를 두드려보면 이것은 명백한 ​'손실'​입니다. 기껏 힘들게 수행해서 평화로운 정상(깨달음)에 올랐는데, 다시 지지고 볶는 고통의 바닥으로 내려가라니요.

하지만 선사들은 말합니다. "그 꼭대기에만 앉아 있는 사람은 가짜다."
홀로 고고하게 앉아 있는 것은 ​'자신에 대해서는 주인(주관적)이지만, 타인에 대해서는 방관자(객관적)'​인 상태입니다. 키에르케고르의 말처럼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에 대해서는 주관적이지만 타인에 대해서는 지나칠 정도로 객관적"입니다. 타인을 그저 '풍경'이나 '물건'처럼 보는 것이죠.
진짜 완성은 그 고고한 자리를 박차고 내려와, ​타인의 고통 속으로 나의 자유를 던져 넣는 것​입니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하화중생(下化衆生)'​, 즉 아래로 내려가 중생을 구제한다고 말합니다. 나의 평온함(이익)을 포기하고 당신의 소란함(손실) 속으로 들어가는 이 ​'목숨을 건 비약'​이 없다면, 우리의 자유는 그저 '도망침'에 불과할지도 모릅니다.

2. 물소는 왜 창살에 '꼬리'를 남겨두었을까요?

자유를 찾아 떠나는 여정을 가장 아름답게, 그리고 가장 애틋하게 묘사한 화두가 있습니다. 바로 ​'우과창령(牛過窓櫺)'​, 즉 '물소가 창살을 통과하다'라는 이야기입니다(38칙).

오조 법연 스님이 묻습니다.
"물소 한 마리가 창살 틈으로 나가려고 한다. 머리도, 뿔도, 그 커다란 몸통도, 네 다리도 다 빠져나갔다. 그런데 왜 꼬리는 통과하지 못하는 것인가?"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됩니다. 그 거대한 몸통과 뿔도 다 빠져나갔는데, 가느다란 꼬리가 걸릴 리가 없습니다.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이죠. 여기서 우리는 계산기를 멈추고 ​'마음의 눈'​으로 봐야 합니다.
물소가 창살을 빠져나가는 것은 '해탈(자유)'을 의미합니다. 감옥 같은 세상, 집착의 방에서 탈출하여 완전한 자유의 들판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물소는 '일부러' 꼬리를 남겨두었습니다. 꼬리가 걸린 게 아니라, 통과하지 '않은'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창살 안에는 아직 탈출하지 못한 ​동료 물소들​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나 먼저 갈게, 안녕!" 하고 쿨하게 떠나버리면 그만입니다. 그것이 개인에게는 최대의 이익입니다. 하지만 먼저 자유를 얻은 물소는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꼬리(흔적)를 창살에 남겨둡니다. 뒷사람들이 그 꼬리를 잡고 따라나올 수 있도록, 혹은 "나도 여기 있었어, 너희도 나올 수 있어"라는 신호를 보내기 위해서입니다.

이 꼬리가 바로 ​'자비(Maitri-Karuna)'​입니다.
완벽하게 떠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타인을 위해 기꺼이 나의 일부분을 구속시키는 것. 나의 자유(이익)를 유보하고 타인과 연결되는 고통(손실)을 감수하는 것. 이것이 바로 주인공이 타인을 사랑하는 방식입니다. 여기서 '손실'은 단순한 마이너스가 아닙니다. 내가 선택해서 남겨둔 꼬리이기에, 그것은 나의 자발적 의지이자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익)'​의 증거가 됩니다.

3. 사랑은 '더러운 손'을 갖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사랑을 '아름답고 고귀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현실의 사랑은 구질구질합니다. 아픈 아이의 토사물을 치워야 하고, 술 취한 친구의 하소연을 들어줘야 하고, 늙은 부모님의 대소변을 받아내야 합니다.
고고한 척, 깨끗한 척해서는 결코 할 수 없는 일들입니다.

신라 시대의 ​원효 스님​은 당대 최고의 지성이자 고승이었습니다. 왕실의 존경을 받고 편안하게 살 수 있는 '상근기(엘리트)'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스스로 파계승이 되어 거지와 광대들 틈으로 들어갔습니다. 이름도 '소성거사(보잘것없는 사람)'라고 바꿨습니다.
그는 왜 존경받는 스님의 지위(이익)를 버리고, 손가락질받는 거리의 삶(손실)을 택했을까요?

원효는 알았던 것입니다.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려면, 나도 물에 젖어야 한다"​는 사실을요.
강가에 서서 "이리 나오세요"라고 점잖게 말하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같이 물속으로 뛰어들어야 합니다. 진흙탕에서 뒹구는 사람을 일으키려면 내 손에도 진흙을 묻혀야 합니다.
불교에서는 이를 ​'동사섭(同事攝)'​이라고 합니다. 상대방과 같은 모습, 같은 위치가 되어 함께 일하며 돕는다는 뜻입니다.

깨끗한 손으로는 아무도 구원할 수 없습니다. 타인의 눈물을 닦아주려면 내 손수건이 젖어야 하고, 타인의 짐을 덜어주려면 내 어깨가 무거워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의 ​'이익 프레임'​을 다시 꺼내봅시다.
타인을 위해 내 손을 더럽히는 것, 이것은 손해일까요?
아닙니다. ​내가 원해서 선택한 더러움​은 더 이상 더러움이 아닙니다. 그것은 내가 이 상황의 주인이라는 증거이며, 내 사랑이 관념이 아니라 실체라는 것을 증명하는 ​'훈장(이익)'​입니다.

4. 춤추되 밟지 않고, 섞이되 물들지 않기

여기서 딜레마가 생깁니다. 타인을 위해 진흙탕에 뛰어들고 꼬리를 남겨두는 것은 좋은데, 그러다 나까지 진흙탕에 빠져 허우적대거나 창살에 다시 갇히면 어떡하나요? 내 인생도 힘든데 남의 짐까지 지다가 '공멸'하는 것 아닐까요? 이것은 모든 '착한 사람들'이 겪는 현실적인 공포입니다.

그래서 26칙 ​'이승권렴(두 스님이 발을 걷어 올리다)'​의 지혜가 필요합니다.
법안 스님이 가리킨 '발(블라인드)'을 두 스님이 걷어 올렸습니다. 스승은 말합니다. "한 사람은 옳고, 한 사람은 틀렸다."
똑같은 행동을 했는데 왜 평가는 다를까요?
한 사람은 발을 걷어 올리며 '바깥세상(대상)'에 마음을 뺏겼고, 한 사람은 발을 걷어 올리며 '내 마음의 어둠(알라야식)'을 걷어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세상 속으로, 관계 속으로 들어갈 때 필요한 마음은 ​'물과 같은 마음'​입니다. 물은 네모난 그릇에 담기면 네모가 되고, 둥근 그릇에 담기면 둥글게 변합니다. 타인에게 맞춰줍니다. 하지만 물의 본질(H2O)은 변하지 않습니다.
섞이되 물들지 않는 것.
진흙탕에 들어가서 친구의 손을 잡지만, 내 중심은 단단히 잡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친구를 끌어올릴 수 있습니다. 같이 울어주되(공감), 감정의 늪에 함께 빠져 익사하지 않는 ​'거리 두기'​가 필요합니다.

이것은 ​'훈련된 사랑'​입니다.
꼬리를 남겨두어 타인을 돕되, "내가 너를 위해 내 꼬리를 희생했어"라고 생색내거나 보상을 바라는 마음(계산)을 버리는 것입니다. 보상을 바라는 순간, 그것은 '투자'가 되고 실패하면 '손실'이 됩니다.
하지만 ​"나는 그저 내가 하고 싶어서 꼬리를 남겼을 뿐이다"​라고 생각한다면?
상대방이 고마워하든 말든 상관없습니다. 나는 이미 내 행동을 통해 사랑을 실천했고, 스스로 주인공이 되었으니 ​이미 이익을 본 것​입니다. 이것이 관계 속에서도 상처받지 않는 ​'단독자'로서의 사랑​을 완성하는 비결입니다.

5. 당신은 누구를 위해 꼬리를 남겨두었나요?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습니다. 나 혼자 행복한 것은 불가능합니다. 옆 사람이 울고 있으면 내 춤도 신이 나지 않으니까요.
진정한 주인공은 자신의 무대를 독차지하는 사람이 아니라, ​주변의 조연들을 빛나게 해서 무대 전체를 꽉 채우는 사람​입니다.

100척 대나무 위에서 내려오세요.
안전한 산속에서 내려와, 지지고 볶는 현실의 시장통으로 들어오세요.
그리고 당신의 자유, 당신의 능력, 당신의 웃음이라는 '꼬리'를 슬쩍 남겨두세요.
누군가 당신의 꼬리를 잡고 어둠 속에서 걸어 나올 수 있도록 말입니다.

그것은 당신에게 '손해'가 아닙니다.
당신의 우주가 그만큼 더 넓어지는, 가장 위대한 ​'확장'​입니다.

오늘의 질문

당신은 지금 '나 혼자만의 편안함'을 위해 외면하고 있는 사람이 있나요? 그 사람을 위해 기꺼이 내 손을 더럽히거나, 나의 꼬리(시간, 돈, 관심)를 내어줄 용기가 있나요? 그것이 '희생'이 아니라 '나의 선택'이라고 생각할 때, 마음이 어떻게 달라지나요?

출발점이 된 책
강신주, 『매달린 절벽에서 손을 뗄 수 있는가? : 무문관, 나와 마주 서는 48개의 질문』, 동녘, 2014. 이 글은 책과 『무문관』의 화두에서 출발한 설탕바른위로의 재해석이다. 책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