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가의 착시 — ‘서술형’이라는 구호와 평가 설계의 본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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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소멸의 사회

평가의 착시 — ‘서술형’이라는 구호와 평가 설계의 본질

자정을 갓 넘긴 시각, 조용한 방 안을 밝히는 것은 책상 위의 작은 스탠드 불빛뿐이다. 고등학교 2학년 학생의 손가락이 문제집 여백 위에 정답을 적어 내려간다. 내신 서술형 평가를 대비하기 위해 영어 교과서 본문 30문장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외워 쓰는 중이다. 옆에 놓인 수학 오답 노트에는 선생님이 지정해 준 특정 증명 문제의 3단계 풀이 과정이 토씨 그대로 복기되어 있다.

"이 지점에서 왜 하필 이 공식을 써야 하지?" 혹은 "왜 이 보조선을 그어야 하는가?"라는 물음은 어디에도 없다. 오직 출제자가 그어놓은 가이드라인과 똑같은 문장을 머릿속에서 '인출'해 내는 기계적 손가락의 움직임만 존재할 뿐이다.

바로 그 순간, 거실 TV 스크린에서는 거창한 앵커의 목소리가 흐른다. "국가교육위원회가 대입 수능에 서·논술형 평가를 도입하는 방안을 공론화 의제로 결정했습니다. 정답을 고르는 객관식 수능에서 벗어나, 아이들의 깊은 사고력과 논리력을 측정하겠다는 취지입니다…"

자정을 넘긴 책상 위의 암기 노동과 TV 속 '사고력 평가'라는 거창한 구호 사이의 이 아득한 기표적 간극. 이것이 바로 2026년 8월, 대한민국 교육이 맞닥뜨린 '평가의 착시'가 시작되는 장면이다.

2026년 8월, 정치적 신호와 급속한 공론화

2026년 8월, 한국 교육계는 다시 한번 커다란 파장에 휩싸였다. 국가교육위원회가 내신 서·논술형 평가 확대와 함께 수능 서·논술형 도입 여부를 국민참여위원회의 숙의토론 의제로 올려놓으면서, 서술형 평가 도입은 단순한 교육학계의 제안을 넘어 국가적 대입 개편의 공식 논의표면으로 떠올랐다. 1

이 급격한 공론화의 배경에는 8월 초 대통령 업무보고에서 불거진 '객관식 중심 교육 탈피'라는 정치적 신호가 자리 잡고 있었다. 정책 수장의 직속 지시 형태라기보다, "이제는 교육이 좀 바뀌어야 하지 않나"라는 방향 신호가 던져지자 오랫동안 위원회 내부에서 맴돌던 서·논술형 카드가 결합하며 불과 몇 주 만에 전 사회적 공론화 의제로 급속히 점화된 것이다.

문제는 교육이 '백년대계'라 불림에도 불구하고, 백년의 고심 대신 정치적 메시지와 의제의 우연적 결합이 정책 속도를 결정하는 기이한 긴장이 반복된다는 점이다. 정답을 고르는 시험에서 '왜 그렇게 판단했는가'를 묻는 시험으로 옮겨가겠다는 명분은 매혹적이지만, 현장의 현실과 평가학적 본질을 떼어놓은 구호는 곧 거대한 착시를 만들어낸다.

길어진 객관식 — 현장 서술형의 쓸쓸한 실상

이미 수년 전부터 학교 현장 내신 평가에는 서·논술형 문항이 일정 비율 이상 의무화되어 적용되어 왔다. 그렇다면 지금의 내신 서술형은 과연 아이들의 깊은 사고력을 측정하고 있는가? 30년 입시 현장을 지켜본 이들과 교실 속 교사들의 답변은 서늘할 정도로 일치한다.

현재의 많은 내신 서술형 평가 역시 본질적으로는 '암기형 시험'의 다른 변형에 불과하다. 영어 시험에서는 교과서 본문 문장이나 변형된 지문 표현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외워서 적도록 요구한다. 수학 평가 역시 다르지 않다. 학생이 스스로 새로운 사고 경로를 개척하는 것이 아니라, 정해진 풀이 순서나 증명 문장을 그대로 외워서 재현(인출)하는 방식이 주를 이룬다. 답안지 위의 글자는 길어졌고 정답의 형태는 서술형으로 바뀌었지만, 정작 답을 적어 내려가는 그 순간 학생이 스스로 판단하고 고심해야 하는 '사고의 양'은 조금도 늘어나지 않았다.

학생이 풀이를 '정말 알아서 쓴 것'과 '외워서 쓴 것'의 차이는 선명하다. 그것은 바로 "왜 이 지점에서 이 생각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스스로 답할 수 있느냐이다. 공식을 적용했다면 왜 하필 그 순간 그 공식이어야 했는지, 증명의 다음 단계로 넘어갔다면 왜 그 연결이 필수적인지를 설명할 수 있어야 진짜 사고다. 그러나 현재의 수많은 서술형은 출제자가 미리 그어놓은 '정답 경로'를 얼마나 정확히 복기했는가만을 측정하며, 정작 '왜'라는 사고과정은 묻지 않는다. 이것은 서술형의 탈을 쓴 '길어진 객관식'이자 '유형화된 암기'에 다름 아니다.

서술형이라는 위계 — 정책이 만든 상징적 착시

이 지점에서 우리 사회는 강력한 세뇌에 가까운 정책적 메시지와 마주한다. "객관식은 낡고 주입적인 암기 교육이고, 서·논술형이야말로 사고력과 창의성을 키우는 선진적 평가"라는 이분법적 신화가 그것이다. 정책 당국은 제도를 바꾸기 전에 언제나 사람들이 평가를 바라보는 언어의 위계부터 만들어낸다.

그러나 평가학 연구와 실증적 검증 결과는 이 같은 대중적 등식이 왜곡되어 있음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2026년 고차사고력 평가에 관한 체계적 문헌고찰(Systematic Review) 연구에 따르면, 비판적 사고, 추론, 문제 해결력과 같은 고차사고력(Higher-Order Thinking)은 서술형·구성형 도구뿐만 아니라 선다형(객관식) 문항을 통해서도 오랜 기간 정교하게 측정되어 왔다. 2

즉, '서술형 = 사고력 평가, 객관식 = 저차원 암기'라는 자동 공식은 학술적으로 전혀 지지되지 않는다. 평가의 본질은 답안의 겉보기 '형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학생에게 어떤 판단을 요구하도록 '문항을 어떻게 설계했는가'에 있다.

객관식 문항이라 할지라도 낯선 상황 제시, 개념 간의 비판적 전이, 오개념을 가려내는 조건 추론 등을 요구하도록 정교하게 설계하면 깊은 사고력을 평가할 수 있다. 반대로 아무리 거창한 논술·서술형 시험이라 할지라도 출제자가 채점의 편의를 위해 미리 정해둔 키워드와 답안 틀을 재현하게 만든다면, 그것은 가장 저차원적인 인출 중심 평가로 전락한다.

변별이라는 제약과 한국 대입의 역설

그렇다면 한국 사회는 왜 문항의 정교한 '설계' 대신 서술형이라는 '형식'에 그토록 매달리는가? 그 근원에는 한국 대입 시험이 안고 있는 거대한 사회적 제약, 즉 '변별 압력'이 존재한다.

표방하는 명목은 '대학에서 공부할 수 있는 능력(대학수학능력)'이지만, 한국 수능의 실질적 기능은 수십만 명의 학생을 치열하게 나열하여 수능 점수 차로 대학 자리를 배분하는 '선발 및 변별 장치'다. 수험생과 학부모, 대학, 사교육 시장이 눈을 서슬 퍼렇게 뜨고 관찰하는 시험에서, 학생마다 각기 다른 논리적 적합성과 창의적 사고 경로를 허용하는 진정한 의미의 서술·논술 평가를 시행하는 것은 극도로 어렵다.

자유로운 사고 경로를 평가하려면 채점자의 주관적 판단권이 개입되어야 한다. 그러나 채점자의 판단권이 커지는 순간, 한국 사회에서는 즉각적으로 공정성과 채점 신뢰도 문제가 폭발한다. 전국 단위 구성형 평가를 안정적으로 치르려면 채점자 선발·훈련·캘리브레이션, 복수 채점, 이의제기 절차 등 막대한 제도적 비용을 치러야 한다. 3

결국 이 공정성 통제를 통과하기 위해 출제 기관이 선택할 수밖에 없는 길은 하나다. 학생들의 다채로운 생각을 보는 것이 아니라, 오직 '채점 가능한 사고'만을 허용하도록 가이드라인을 극도로 좁히는 것이다. 그 결과 서술형 시험은 자유로운 사고의 장이 되기는커녕, 정답 경로에서 벗어나면 부분점수를 깎는 난이도 상승 도구로 변질되고 만다.

만약 현재의 수능 체제에서 객관식 형식을 그대로 유지한 채 기존의 기출 유형 복기만으로는 풀 수 없는 '유형 파괴형 추론 문항'을 출제한다면 어떻게 될까? 객관식으로도 사고력을 충분히 볼 수 있다는 사실은 증명되겠지만, 상위권 점수가 흔들리고 예측 등급컷이 무너지는 순간 사회적 비난과 책임 추궁이 평가원장을 향해 쏟아질 것이다. 진정한 사고력 평가를 가로막아 온 것은 '객관식'이라는 형식이 아니라, 유형을 깨뜨렸을 때 발생하는 불확실성을 감당하지 못하는 입시 시스템 자체다.

형식을 넘어 설계로 — 그리고 거꾸로 서는 질문

"이 평가에 서술이 무엇이고 객관이 왜 중요한가?"라는 물음은 평가 개혁이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를 선명하게 가리킨다. 답안을 작성하는 손가락의 움직임이 길어지는 것으로는 아이들의 생각이 깊어지지 않는다.

평가의 본질은 답안의 겉모습에 대한 구호가 아니라, 문제의 설계에 있다. 정답을 암기하여 인출하게 할 것인가, 조건을 가로질러 추론하게 할 것인가, 타 분야의 개념을 접목하여 해결력을 보게 할 것인가. 이 본질적인 질의를 빼놓은 채 추진되는 '서술형 수능'이라는 구호는, 결국 또 다른 유형 암기 시장을 호출하는 서글픈 착시에 불과하다.

내신 서술형 시험지에서 정답 채점 가이드라인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답안을 적어내어 100점을 맞은 학생이 있다. 그러나 "그런데 이 문제에서 왜 하필 이 개념을 써야만 하나요?"라는 교사의 뜻밖의 물음 앞에 학생은 머뭇거리며 말을 잇지 못한다. 가르치는 교실의 풍경과 아이들의 학습 경험은 어제와 똑같이 '유형 암기'에 머물러 있는데, 시험지 겉표지만 서술형으로 바꾼 교실의 서글픈 초상이다.

그렇다면 질문은 이제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밖에 없다. 가르치는 수업 방식과 아이들의 학습 경험은 그대로 둔 채, 시험지 형태부터 서술형으로 바꿔놓는다면 교실과 사교육 시장에는 과연 어떤 일들이 벌어질 것인가?

출처와 참고자료

  1. iMBC (2026.9.7). 「PD수첩」 AI 시대, 기로에 선 수능…논·서술형 도입이 공교육 살릴까.수능 논·서술형 공론화와 논술 사교육, 교실 수업 및 채점 문제를 취재한 방송 소개.
  2. Assessment of higher-order thinking in education—A systematic review of empirical studies (2026). Studies in Educational Evaluation, 90, 101655.고차사고를 측정하는 구성형·선다형 등 평가 도구의 사용을 다룬 체계적 문헌고찰.
  3. McCaffrey, D. F., Casabianca, J. M., Ricker-Pedley, K. L., Lawless, R., & Wendler, C. (2022). Best Practices for Constructed-Response Scoring. ETS Research Report RR-22-17.사람과 자동 채점의 개발·운영·품질 관리에 관한 지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