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심 3줄 요약
- 경쟁을 거부하는 위로는 왜 그렇게 많은 사람을 살렸는가.
- “네 잘못이 아니다”는 말은 자존감을 지키는 임시 기둥이 될 수 있다.
- 그러나 경기장을 떠난 뒤에도 삶이 계속된다면, 다음에는 무엇을 해야 할까.
「소진된 우리를 위한 생존의 계보학」 · 1부 · 연재 목차
1부. “노력하지 않을 권리”의 달콤함과 그 후폭풍
부제: 숫자가 된 삶에 대한 저항, 그리고 ‘정신 승리’의 명과 암
1. 우리는 왜 ‘자발적 패배’를 선택했나?
불과 몇 년 전, 한국 사회를 강타한 베스트셀러들의 정서는 ‘억울함’과 ‘탈출’이었습니다. 우리는 학교, 가정, 직장에서 끊임없이 “노력하면 성공한다”는 신화를 주입받았습니다. 하지만 성인이 되어 마주한 현실은 달랐습니다. 노력은 배신했고, 성실함은 무능력으로 치부되기도 했으며, 세상은 우리를 끊임없이 숫자로 줄 세웠습니다.
이 시기, 김수현 작가의 『나는 나로 살기로 했다』는 지친 청춘들에게 일종의 ‘해방 선언문’이었습니다. 작가는 우리가 불행한 이유가 “삶의 가치는 잊은 채 서로의 값어치를 묻는, 숫자의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라고 진단합니다.
“우리는 무엇이든 숫자로 책정하는 것을 너무 좋아한 나머지 나 자신의 값어치를 매기는 일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 아이큐가 지혜를 측정할 수 없고 친구의 숫자가 관계의 깊이를 증명할 수 없으며 집의 평수가 가족의 화목함을 보장할 수 없고 연봉이 그 사람의 인격을 대변할 수 없다.”
이 문장은 당시 ‘스펙 경쟁’에 지친 우리에게 엄청난 카타르시스를 주었습니다. “내가 부족한 게 아니라, 세상의 채점 기준이 잘못됐다”는 선언은 패배감에 젖어 있던 개인들에게 ‘나로서 존재할 명분’을 쥐여주었습니다.
2. 노력의 배신, “경기장을 떠나겠습니다”
김수현 작가가 ‘평가 거부’를 외쳤다면, 하완 작가는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했다』를 통해 아예 ‘경기 포기’를 선언합니다. 그는 “노력해도 안 되는 것이 있고, 노력한 만큼 보상이 없을 수도 있다”는 냉혹한 진실을 인정하자고 말합니다. 그리고 아주 도발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부러우면 지는 거다. (…) ‘졌다’는 느낌처럼 참담한 기분은 없으니. 부러워하지 않으면 패배도 없다. 그러고 보면 우리 사회는 확실히 경쟁 사회다. (…) 열심히 사니까 자꾸 승패를 따지게 된다. (…) 지는 게 싫어서 열심히 살지 않기로 했다.”
이것은 게으름이 아니었습니다. 승자 독식 구조의 게임에서 ‘스스로 기권함’으로써 패배를 원천 봉쇄하려는 고도의 심리적 방어 기제였습니다. 우리는 이 책을 읽으며 “그래, 안 해! 나 안 해!”라고 소리치며 경쟁 트랙 밖으로 뛰쳐나가는 상상을 했고, 그 상상만으로도 숨통이 트이는 것을 느꼈습니다.
3. 위로의 방식: “네 잘못이 아니야”라는 면죄부
이 시기 에세이들의 공통점은 독자에게 ‘무한한 면죄부’를 발행했다는 점입니다. 김수현 작가는 초라함을 느끼는 청춘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냉담한 세상에서 아무런 잘못 없이 스스로를 질책해야 했던 나와 닮은 누군가에게 전하고 싶다. 우린 잘못이 없다고. 나로서 당당하게 살아가도 된다고 말이다.”
하완 작가 역시 자신의 인생을 건 실험을 통해 “열심히 살지 않아도 내 인생은 망하지 않았다”고 증명하려 했습니다. 이 메시지들은 경쟁 사회에서 탈락하거나 뒤처진 이들에게 “너는 틀리지 않았어”라는 강력한 ‘자존감의 요새’가 되어주었습니다. 이것은 사회적 안전망이 부재한 한국 사회에서 개인이 스스로에게 처방할 수 있는 유일한 ‘정서적 진통제’였습니다.
4. 한계: “하지만 자유가 밥 먹여주지는 않더라”
하지만 이 달콤한 ‘멈춤’과 ‘정신 승리’에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습니다. 책을 덮고 나면 다시 마주해야 할 현실은 여전히 냉혹했고, ‘정신 승리’만으로는 월세를 낼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하완 작가는 퇴사 후의 자유를 만끽하면서도, 동시에 찾아온 불안을 솔직하게 고백합니다.
“자유로운 시간을 누리기 위해선 비용이 든다. 내가 자유를 팔아 모아뒀던 돈을 고스란히 다시 자유를 사는 데 쓰고 있는 셈이니 참 아이러니하다. (…) 나는 월급과 이별했다. 가끔 그녀(월급)와 함께했던 추억들을 떠올리며 미소를 짓곤 하는데, 그럴 때면 그녀가 사무치게 그리울 때도 있다.”
우리는 “열심히 살지 않겠다”고 선언하며 잠시 경쟁 트랙에서 내려왔지만, 트랙 밖의 삶은 낭만이 아니었습니다. 통장 잔고는 줄어들고, 남들은 저만치 앞서가는 것 같은 불안감은 여전했습니다. 하완 작가 스스로도 “이 자유는 유통기한이 정해진 자유”라고 시인합니다.
5. 결론: 대안 없는 위로의 유효기간 종료
1세대 힐링 에세이들의 한계는 명확했습니다. ‘무엇을 하지 않을 것인가(Not-to-do: 노력, 경쟁, 비교)’는 알려주었지만, ‘그래서 내일 당장 무엇을 할 것인가(What to do)’에 대해서는 침묵했기 때문입니다.
“그대로 있어도 괜찮아”라는 말은 따뜻했지만, 우리를 구원하지는 못했습니다. 위로의 약발이 떨어지자, 우리는 다시금 맨몸으로 세상의 추위와 마주해야 했습니다. 이제 대중은 깨달았습니다. 마음을 바꾸는 것만으로는 현실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을요.
그래서 우리는 다음 단계로 이동합니다. 막연한 희망이나 위로 대신, 내 마음을 다치지 않게 단단히 걸어 잠그고(방어), 최소한의 에너지로 나를 지키는(유지보수) 현실적인 생존 기술을 찾기 시작한 것입니다. (2부에서 계속)
인용·참고
- 김수현, 『나는 나로 살기로 했다』
- 하완,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