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심 3줄 요약
- 고통을 줄이는 삶은 왜 매력적이며, 어디까지 우리를 지켜주는가.
- 거리두기와 루틴은 무너지는 삶을 유지하는 현실적인 방어술이다.
- 하지만 방어가 삶의 목표가 되는 순간, 안전한 방공호는 고립이 된다.
「소진된 우리를 위한 생존의 계보학」 · 2부 · 연재 목차
쇼펜하우어의 독설과 ‘조용한 행복’이 건네는 현실적 처세술
1. 위로의 유효기간이 끝난 자리, ‘각자도생’의 시작
1부의 시기, 우리는 “노력하지 않아도 괜찮아”라는 달콤한 위로에 열광했습니다. 하지만 책을 덮고 나면 마주해야 하는 현실은 여전히 냉혹했습니다. 월세는 밀려오고, 회사의 부조리는 여전하며, 인간관계는 피로했습니다. 위로는 진통제였을 뿐, 병을 치료해주지는 못했으니까요.
사람들은 깨달았습니다.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면, 내가 세상으로부터 ‘안전거리’를 확보해야 한다는 것을요. 이제 우리는 막연한 희망 대신, 내 삶을 구체적으로 방어할 수 있는 ‘방패’와 ‘참호’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서점가를 휩쓴 쇼펜하우어 열풍과 ‘조용한 행복’을 예찬하는 흐름은 바로 이러한 ‘수비적 개인주의’의 등장을 알리는 신호탄이었습니다.
2. 첫 번째 방패: “행복하려 애쓰지 마라, 고통을 줄여라”
이 시기의 가장 큰 특징은 행복의 정의가 바뀐 것입니다. 과거의 행복이 무언가를 성취하고 얻어내는 ‘플러스(+)’의 개념이었다면, 이제는 불행을 막아내고 고통을 줄이는 ‘마이너스(-)’의 개념으로 이동했습니다.
강용수 작가가 풀어낸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는 이 지점을 정확히 타격합니다. 그는 인생을 “고통과 권태 사이를 오가는 시계추”로 정의하며, 적극적으로 행복을 찾으려 할수록 오히려 불행해진다고 경고합니다.
“행복은 꿈이지만 고통은 현실이다. 쇼펜하우어의 행복론은 쾌락의 적극적인 추구가 아니라 고통의 감소 또는 결핍의 지양이라는 소극적인 입장이다. (…) 현자는 쾌락이 아니라 고통이 없는 상태를 추구한다.”
태수 작가의 『어른의 행복은 조용하다』 역시 이 맥락을 같이합니다. 그는 거창한 꿈 대신 ‘오늘 하루 별일 없었음’에 안도하는 삶을 예찬합니다.
“어른이 된 나의 목표는, 아니 꿈은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다. 불행해지지 않는 것이다. (…) 행복이 더 많아진 삶이 아니라 불행이 더 줄어든 삶이다.”
이것은 패배주의가 아닙니다. 예측 불가능한 세상에서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나의 기대치를 낮추는 것’ 뿐임을 인정한, 지극히 현실적이고 냉철한 생존 전략입니다. 우리는 이제 ‘대박’을 꿈꾸기보다 ‘쪽박’을 차지 않기 위해 몸을 웅크리기 시작했습니다.
3. 두 번째 방패: “다정함은 체력에서 나온다” (관계의 구조조정)
방어 기제는 인간관계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났습니다. 과거에는 “우리가 남이야?”라며 끈끈한 정을 강조했다면, 이 시기의 텍스트들은 “우리는 남이다”라는 사실을 쿨하게 인정하자고 말합니다.
태수 작가는 관계의 피로함을 호소하는 현대인들에게 아주 명쾌한 진단을 내립니다. 우리가 타인에게 다정하지 못한 건, 성격이 나빠서가 아니라 ‘체력’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다정함은 체력에서 나온다. 달달한 사랑이나 찐한 우정도 결국 다 건강해야만 가능했다.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사람에겐 부모도 부부도, 결국은 남이다. (…) 혼자가 좋다는 말은 사실 ‘잠시 숨 돌릴 시간 좀 줘’라는 말의 다른 표현이었을 뿐…”
최서영 작가의 『어른의 품위』 또한 무례한 세상으로부터 나를 지키기 위해 ‘단호함’과 ‘거리두기’를 강조합니다. 그녀는 타인의 무례함을 참아내는 것이 미덕이 아니라, 나를 지키기 위해 정확하게 선을 긋는 것이 어른의 태도라고 말합니다.
“무례한 사람을 만났을 때 가장 좋은 대처법은 무엇일까. 일단 절대 웃지 말아야 한다. (…) 무례한 말을 들었을 때 화를 내지는 않더라도 ‘너의 말이 불편하다, 그러니 다시는 하지 말아라’라는 메시지는 꼭 전하는 게 좋다.”
우리는 이제 내 몫의 에너지를 지키기 위해 ‘관계의 미니멀리즘’을 실천합니다. 쇼펜하우어가 “인간은 혼자 있을 때만 온전히 그 자신일 수 있다”고 말했듯, 불필요한 감정 소모를 줄이고 ‘자발적 고립’을 선택함으로써 비로소 안정을 찾기 시작한 것입니다.
4. 세 번째 방패: “내 삶을 관리하고 있다는 감각” (루틴과 유지보수)
성장을 멈춘 시대,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현상 유지(Maintenance)’였습니다. 더 높이 올라가는 것은 불가능해 보이니, 지금 가진 몸과 마음이라도 고장 나지 않게 관리하는 것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하완 작가는 『대충의 자세』에서 중년의 몸을 낡은 자동차에 비유하며, 이제는 성장이 아닌 ‘관리’가 필요한 시점임을 역설합니다.
“몸이 예전 같지 않은 거다. (…) 낡은 자동차를 관리하듯 몸을 잘 관리해서 타고 다니는 수밖에. 내가 운동을 시작한 이유는 살을 빼기 위함도 있지만 그보다 앞서 몸을 잘 관리해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최서영 작가 역시 아침에 일어나 물을 마시고, 영양제를 챙겨 먹는 사소한 루틴들이 결국 “내가 나를 아끼고 있다”는 감각을 준다고 말합니다.
“거울 속 나를 보며 ‘내가 나를 아끼고 있구나’라는 뿌듯함을 느끼고, 내 삶이 단정하게 정돈되어 가고 있다는 안도감도 따라온다.”
거창한 성공 대신, 내 방을 청소하고 내 몸을 씻는 행위를 통해 무너져가는 자존감을 지탱하는 것. 이것이 이 시대가 발명한 가장 구체적이고 실용적인 ‘방어술’이었습니다.
5. 한계: 안전하지만 고립된 방공호
하지만 이 완벽해 보이는 ‘수비 전략’에도 치명적인 약점이 있습니다. 바로 ‘고립’과 ‘허무’입니다.
고통을 피하기 위해 문을 걸어 잠그고, 기대를 낮추고, 관계를 끊어내자 삶은 확실히 안전해졌습니다. 상처받을 일은 줄어들었죠. 하지만 그만큼 기쁨과 설렘, 성장의 가능성도 함께 차단되었습니다. 태수 작가 스스로도 “혼자가 좋다는 말은 사실 잠시 숨 돌릴 시간을 달라는 뜻일 뿐, 영원히 혼자가 되고 싶진 않았다”고 고백합니다.
우리는 안전한 방공호 속에서 쇼펜하우어의 책을 읽으며 “인생은 원래 고통이야”라고 고개를 끄덕였지만, 문을 열고 나가면 여전히 춥고 외로운 현실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나를 지키는 것”에는 성공했을지 몰라도, “나를 긍정하고 확장하는 것”에는 실패한 셈입니다.
단단한 껍질 속에 숨어버린 우리는, 이제 다시 묻게 됩니다. “상처받지 않는 것이 삶의 목표가 될 수 있을까? 우리는 단지 ‘안 아프기 위해’ 태어난 존재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우리는 이제 방공호 문을 열고 다음 단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고통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내 삶의 재료로 삼아 ‘나만의 이야기’를 만드는 단계로 말이죠. (3부에서 계속)
인용·참고
- 강용수,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
- 태수, 『어른의 행복은 조용하다』
- 최서영, 『어른의 품위』
- 하완, 『대충의 자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