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가 구현비용을 낮춘 뒤의 능력
저장의 폐기가 아닌 질문과 판단의 재배치
프롬프트 창 앞에서의 당황
노트북 화면 위, 프롬프트 입력창에 중2 일차함수와 도형의 닮음이 결합된 고난도 서술형 문항을 입력한다. [Enter] 키를 누르자마자, 생성형 AI는 불과 3초 만에 완벽한 수식 전개, 시각적 그래프 모형, 그리고 상세한 단계별 풀이 과정을 화면 가득 쏟아낸다.
옆에서 이를 지켜보던 아이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자신이 지난 일주일 동안 교사와 씨름하며 문답을 주고받고, 지우개 가루를 쌓아가며 겨우 이해했던 그 거대한 풀이의 과정이 단 몇 초 만에 완성품으로 출력된 것이다.
"와… 선생님, 이거 진짜 대박이네요. 이제 이거 있으면 어려운 문제 외우고 인출하느라 고생할 필요가 없겠네요?"
그러나 교사가 아이에게 프롬프트 창을 넘기며 나직하게 묻는다. "그래, 풀이는 순식간에 나왔네. 그런데 네가 이 AI에게 던진 질문이 정확히 이 문제의 핵심 요구를 짚고 있니? 그리고 AI가 출력해 준 4번째 줄의 방정식 계산에 환각(Hallucination) 오류가 없는지, 네가 검토해서 맞다고 판단할 수 있겠어?"
아이는 순간 말을 잃고 화면을 멍하니 바라본다. 프롬프트 창에 화려한 답은 쏟아졌지만, 정작 자신이 무엇을 의도하고 물었는지, 이 출력값이 진짜 진실인지 판별할 내부 스키마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이었다. 도구는 비약적으로 정교해졌지만, 그 도구를 주도할 인간의 질문과 판단이라는 병목은 오히려 더 서늘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과거의 구현 다리와 생성형 AI의 등장
과거의 문명에서 한 인간이 머릿속에 품은 생각이나 경험을 세상에 실제 '생산물'로 구현해내기 위해서는 수많은 중간 다리(Bridge)들을 건너야 했다.
아이디어·의도 → 정보 탐색 → 전문지식 습득 → 표현·코딩 기술 → 도구 숙련 → 사람·자본 연결 → 최종 구현
이 중간 다리 하나하나가 모두 높은 시간적·자본적 비용을 요구하는 진입장벽이었다. 그래서 과거의 평가 시스템은 이 중간 다리를 얼마나 잘 건너느냐, 즉 '얼마나 방대한 지식을 저장하고 있고, 필요할 때 제한시간 안에서 얼마나 빠르게 인출·재현할 수 있느냐'를 핵심 능력으로 측정하고 강하게 보상해 왔다.
그러나 생성형 AI의 등장은 이 중간 구현 다리의 비용을 급격히 축소시키고 있다. 정보의 탐색, 초안 작성, 단순 코딩, 수식 전개, 번역과 요약이라는 중간 노동을 외부 도구가 저렴하게 처리해 주기 시작한 것이다.
저숙련자의 우회로: 자기규정에 생기는 새로운 반례
일부 노동 및 인지 연구가 밝혀내듯, 생성형 AI 도입으로 인한 생산성 향상은 고숙련자보다 오히려 기존 성과가 낮았던 초보자나 저숙련자 집단에서 더 크게 나타나는 경향을 보인다.
이는 학교 성적이라는 한 줄짜리 숫자에 갇혀 있던 저성취 아이들에게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과거에는 머릿속 인출 속도가 느리고 수식 재현 능력이 떨어지면 "나는 아무것도 만들 수 없는 무능한 사람"이라는 비관적 결론으로 직행해야 했다. 하지만 생성형 AI는 저장과 단순 인출 능력이 부족했던 학생에게도 자신의 생각을 현실에 구현할 수 있는 새로운 '우회로'를 제공한다.
내가 수식을 빠르게 암기하지 못하더라도, 문제의 맥락을 이해하고 의도를 가진 질문을 던질 수 있다면 도구의 도움을 받아 원하는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다. 이는 "공부를 못하니까 할 수 있는 일도 없다"라는 고정된 자기규정에 균열을 내는 또 다른 강력한 반례가 된다.
새로운 병목의 등장: 저장의 폐기가 아닌 질문과 판단의 고도화
그러나 AI의 등장이 인간 지식과 저장의 가치를 전면 폐기한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도구가 대신 답을 쏟아낼수록, 오히려 인간 쪽에 남아 있는 병목은 더욱 뚜렷해진다.
"무엇을 의도할 것인가 / 무슨 질문을 던질 것인가 / 출력된 결과가 진실인지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
AI가 제시한 수많은 대안 중 오류를 판별하고 최종 선택을 내리려면, 아이러니하게도 인간 내부의 단단한 스키마와 개념적 지식이 반드시 필요하다. 내부 지식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AI를 사용하는 것은, 지도 없이 자동항해 장치만 켜두고 거친 바다로 나가는 것과 같다.
따라서 AI 시대가 요구하는 능력의 재배치는 단순한 지식 무용론이 아니다. 그것은 '경험과 그 경험의 고도화'로의 이동이다.
직접·간접 경험 → 패턴 및 예외 인식 → 의도와 질문 형성 → AI 도구 활용 구현 → 결과의 비판적 검토 및 수정
한 인간이 세상을 직접·간접으로 경험하며 쌓아 올린 맥락이 없다면, AI에게 던질 의도적인 질문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위치의 경제학과 확장된 교육의 역할
기술 환경이 바뀌면 같은 능력도 그것이 발현되는 위치에 따라 완전히 다른 가치를 갖게 된다.
과거에는 표준화된 교실 시험지 위에서 빠르게 인출하는 능력만이 단 하나의 절대적 위치였다. 하지만 이제 자신의 독특한 경험과 관점을 가진 학생이 적절한 기술적 우회로를 만나면, 과거의 기준으로는 상상할 수 없었던 고유한 생산물과 가치를 만들어낼 수 있다.
따라서 고등교육과 공교육이 해야 할 일은 뒤처진 아이들에게 "너도 무조건 학원 회독을 늘려서 저 인출 경쟁에서 1등이 되라"고 강요하는 것이 아니다.
"네가 지금 현재의 시험지 위에서 뒤처져 있다고 해서, 너라는 존재가 세상에 구현할 수 있는 가치까지 적은 것은 아니다."
교육은 아이들이 공부를 못한다는 이유로 스스로의 미래 가능성을 너무 일찍 포기하지 않도록, 다양한 경험을 제공하고 그 경험을 고도화된 질문과 판단으로 바꿀 수 있는 힘을 키워주어야 한다.
교문 밖, 한 줄짜리 숫자를 든 청소년
학교 수업이 모두 끝난 교문 밖. 한 청소년이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성적표를 가방 구석으로 쑤셔 넣으며 걸어 나온다.
성적표에 찍힌 숫자 '5'. 그 숫자를 바라보며 아이는 "난 어차피 공부 못하니까 아무렇게나 살아야지"라고 웅얼거린다. 기술은 이미 생각을 현실로 옮겨주는 수많은 다리를 세상에 놓아주고 있는데, 정작 학교 교문 안에서는 수십 년 전의 단일한 평가 지표 하나로 한 사람의 미래 서사를 폐쇄해 버리는 오래된 관성이 여전히 작동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