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줄 직접답변
- 저성취 학생에게는 막연한 칭찬보다 실제로 자기 힘이 들어간 수행경험이 더 중요할 수 있습니다.
- 작은 수행경험은 ‘나는 원래 못한다’는 자기설명과 충돌하는 반례가 되어 자기효능감을 수정할 수 있습니다.
- 목표는 과대자신감이 아니라 다음 경험과 탐색을 시도할 수 있을 만큼 자기 가능성을 다시 여는 것입니다.
왜 작은 수행경험이 중요할까
저성취 학생을 가르치면서 내가 중요하게 보는 순간은 점수가 크게 오른 날이 아닐 때가 많다.
어느 날 학생이 이전에는 매번 막히던 수준의 문제를 혼자 푼다. 대단히 어려운 문제도 아니다. 상위권 학생에게는 별일 아닐 수 있다.
그런데 표정이 조금 달라진다.
“어? 이거 내가 풀었네.”
내가 중요하게 보는 것은 그다음이다.
“난 아예 못하는 아이는 아닐지도 몰라.”
이것은 칭찬과 다르다.
교사가 “너는 할 수 있어”라고 백 번 말해도 학생이 자기 안에서 아무 근거를 찾지 못하면 그 말은 쉽게 사라진다. 중요한 것은 결과 안에 자기 개입의 흔적이 남는 것이다.
도움을 받았어도 괜찮다.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 해야만 자기 경험이 되는 것은 아니다. 선생이 질문했고, 중간에 힌트를 줬으며, 이전 개념을 다시 꺼내줬을 수 있다.
그래도 마지막 연결을 자기가 했고, 왜 그렇게 풀었는지 어느 정도 설명할 수 있다면 학생은 결과를 자기 경험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내가 한 거다.”
나는 그 감각이 중요하다고 본다.
낮은 성취는 어떻게 자기설명으로 번역될 수 있나
낮은 성취가 반복되면 학생의 머릿속에서는 아주 빠른 번역이 일어날 수 있다.
시험을 못 봤다.
수학을 못한다.
공부를 못한다.
나는 능력이 낮다.
물론 모든 학생이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공부와 자기 자신을 잘 분리하는 학생도 있고, 다른 영역에서 충분한 효능감을 가진 학생도 있다.
하지만 학교성취가 강한 비교기준이 되는 시기에는 낮은 점수가 자기평가까지 흘러갈 수 있다.
자기모델의 균열이란 무엇인가
그래서 내가 만들고 싶은 것은 거창한 자신감이 아니다.
학생의 기존 자기설명과 충돌하는 실제 경험 하나다.
“나는 원래 못해.”
라는 문장 앞에,
“그런데 이건 했는데?”
라는 반례를 놓는 것이다.
굳이 이름을 붙이면, 나는 이것을 자기모델의 균열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 같다.
한 번의 성공으로 인생이 바뀐다는 뜻이 아니다.
“나는 못한다.”
에서
“항상 못하는 건 아닐지도.”
로 아주 조금 이동하는 것이다.
자기효능감 연구는 무엇을 말하나
자기효능감 연구에서도 실제 수행경험, 특히 숙달경험은 중요한 원천으로 다뤄진다. 하지만 이를 “성공을 많이 주면 자신감이 올라간다”로 단순화하고 싶지는 않다.
낮은 난도의 문제만 계속 주고 맞았다고 칭찬하면 다음 현실에서 바로 무너질 수 있다. 반대로 감당하기 어려운 문제를 계속 주며 “실패도 경험이야”라고 말하는 것도 또 다른 실패의 반복이 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실제로 자기 수준에서 한 계단을 넘는 것이다.
성취를 왜 개별적으로 봐야 하나
나는 5등급 학생에게 1등급을 만들어주겠다고 쉽게 말하지 않는다. 학생이 원하고 그것이 다른 선택과 비교해 의미 있다면 높은 목표를 잡을 수 있다. 하지만 모든 학생이 같은 지점에 도달해야 할 이유는 없다.
같은 70점도 누군가에게는 떨어진 성적이고, 누군가에게는 처음으로 자기 힘으로 만든 성취다. 같은 오답도 이유가 다르다. 개념이 없어서 틀렸는지, 조건을 잘못 읽었는지, 계산실수인지, 문제 자체를 이해하지 못했는지에 따라 다음 수업은 달라진다.
그래서 나는 성취는 언제나 개별적이라고 생각한다.
못하는 것과 잘못한 것은 어떻게 다른가
그리고 이 관점에는 중요한 구분이 하나 있다.
못하는 것은 상태이고, 잘못한 것은 행동의 문제다.
수학문제를 못 푼 것은 도덕적 잘못이 아니다. 숙제를 이해하지 못한 것도 잘못이 아니다. 현재의 수행이 부족하다고 해서 학생의 인격까지 낮게 평가할 이유는 없다.
반대로 이 구분은 아무 행동이나 허용하자는 뜻도 아니다. 성취수준은 학생에 따라 다르게 볼 수 있지만, 거짓말이나 타인을 무시하는 행동처럼 관계의 신뢰를 깨는 문제는 다른 층위에서 다뤄야 한다.
이 정도의 경계가 있어야 낮은 성취를 인격의 문제로 만들지 않으면서도 학생을 행동의 주체로 남겨둘 수 있다.
효능감은 재능과 어떤 관계가 있나
이제 다시 효능감으로 돌아가자.
나는 “재능이 있으니까 효능감이 생긴다”는 순서만 보지 않는다. 오히려 효능감을 학습하면서 재능을 발견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정확히 말하면 효능감이 재능을 직접 만드는 것은 아니다. 관심이 먼저 생겨 효능감이 뒤따를 수도 있고, 잘하는 경험이 관심을 키울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경로는 가능하다.
실제로 해본다.
조금 된다.
“나는 아예 못하는 건 아니네”라고 느낀다.
조금 더 해볼 이유가 생긴다.
다른 경험에도 노출된다.
그 과정에서 자신이 잘하는 것을 발견하거나 능력이 더 발달한다.
따라서 효능감은 재능의 증명서가 아니라 다음 탐색을 허용하는 자원에 가깝다.
왜 한 계단이 중요한가
그래서 한 계단이 중요하다.
나는 학생에게 “넌 뭐든 할 수 있어”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한 계단을 넘으면 또 다른 계단이 나타난다.
한계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현재 보이는 한계를 자기 전체의 한계로 착각하지 않게 하는 것이다.
한 계단을 넘어야 다음 계단을 마주할 수 있다.
수학은 학생에게 어떤 도구가 될 수 있나
여기서 수학의 역할도 조금 달라진다.
수학은 모든 사람에게 같은 목적을 갖는 것이 아니다. 공학을 하고 싶은 사람에게는 생산도구가 될 수 있고, 인문을 향하는 사람에게는 관계와 조건을 다루는 사고도구가 될 수 있다. 아직 무엇을 하고 싶은지 모르는 학생에게는 “나는 이런 방식으로 생각할 수 있구나”를 경험하는 자기인식의 도구가 될 수도 있다.
내가 사회나 국어, 영어를 가르쳤어도 비슷한 목표를 가졌을 것 같다.
중요한 것은 수학 자체보다 생각하는 힘, 표현하는 힘, 그리고 실제로 행동하는 힘이다. 지금 내가 가진 도구가 수학이기 때문에 수학을 사용할 뿐이다.
현실적으로 학생은 시험을 치러야 하고 점수를 올려야 하는 시기도 있다. 그러나 시험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학생이 자기 인격까지 점수에 넘겨줄 필요는 없다.
지금 모르면 배우면 된다. 해보고도 한계가 있다면 그 한계를 인정할 수도 있다.
하지만 실제 한계를 만나보기 전에 자기 자신을 먼저 포기하지는 않았으면 한다.
“어? 하니까 되네.”
그 작은 경험은 성공의 약속이 아니다.
다만 다음 질문을 허락한다.
“그럼 나는 또 무엇을 해볼 수 있지?”
그리고 지금은 그 질문을 실제 결과물로 옮기는 데 필요한 다리의 모양 자체가 바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