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리가 다를 뿐 — AI 음악, 누구의 것인가 · 4 / 5
[4편] 값이 풀린다
1. 장바구니 속 가방
아이 가방을 하나 사려고 휴대폰을 연다. 국내 쇼핑몰에서 본 것과 거의 같은 가방이 해외 직구 앱에서는 서너 배 싸다. 배송이 좀 늦을 뿐 사진도 똑같고 후기도 나쁘지 않다. 손가락이 망설임 없이 결제 버튼으로 간다.
2024년 봄, 서울시가 알리익스프레스에서 산 물건 서른한 개를 검사했다. 여덟 개가 기준을 넘었고, 여덟 개 모두 아이들 물건이었다. 그 가운데 어린이 가죽 가방에서는 기준치의 55.6배가 넘는 가소제가 나왔다.
알리는 국내 쇼핑몰과 대형마트에서 파는 것과 같은 제품을 20~30% 값에 판다. 그동안 우리는 그 차이를 바가지라고 불렀다. 중간에서 누가 다 떼어 먹은 거라고. 실제로 그런 부분도 있었을 것이다. 해외에서 싸게 떼어 와 국내에서 비싸게 파는 일은 사는 사람이 원래 값을 모를 때만 가능하고, 모르는 만큼이 남는 장사였다.
그런데 한 기사는 그 차이를 다르게 불렀다. 안전 비용. 정식으로 들여온 물건은 검사를 받고 인증을 받고 세금을 내지만, 해외 직구는 개인이 쓰는 물건이라 그 과정을 건너뛴다. 싼 값에서 빠진 것은 바가지만이 아니었다. 누군가 이 물건을 대신 확인해 줬다는 보증도 같이 빠졌다.
값이 싸진 게 아니라, 값이 풀린 것이다. 그렇다면 풀리기 전에는 무엇이 묶여 있었을까.
2. 한 덩어리였던 값
우리가 내던 값은 늘 한 덩어리였다. 그 안에 여러 값이 묶여 있었는데, 묶여 있어서 보이지 않았다. 물건을 만드는 데 드는 제작값, 이 물건이 믿을 만하다고 누군가 확인해 주는 보증값, 고르고 싶게 만드는 이야기와 취향의 서사값. 그리고 그 셋을 모르는 사람에게 파는 정보값.
정보값은 사는 사람이 모를 때만 붙는다. 원가를 알고, 다른 가게 값을 알고, 직접 사 오는 길을 알게 되면 녹는다. 해외 쇼핑몰이 한 일은 그 정보를 화면 한 장에 펼쳐 놓은 것이다. 덩어리가 풀리면서 정보값이 녹았고, 그 옆에 붙어 있던 보증값까지 같이 떨어져 나갔다.
음악도 지금 다른 방식으로 풀리고 있다. 이번에 녹은 건 정보값이 아니라 제작값이다. 곡 하나를 만드는 데 예전에는 사람과 악기와 녹음실과 시간이 들었다. AI는 그 값을 거의 0으로 만들었다. 몇 분이면 한 곡이 나오고, 같은 가사로 스무 곡을 뽑아도 돈이 거의 들지 않는다. 이 값은 버틴다고 다시 붙지 않는다.
풀리는 이유는 달라도 결과는 닮았다. 덩어리에서 한 값이 빠지자, 남은 값들이 따로 보이기 시작했다. 그중 가장 먼저 갈 곳을 잃은 건 보증값이다.
3. 보증서의 자리
제작값이 사라지자 보증값만 덩그러니 남았다. 이 곡이 누구의 것인지, 허락받은 재료로 만들었는지, 남의 목소리를 몰래 쓰지 않았는지. 앞에서 본 것처럼 귀는 그걸 가려내지 못한다. 듣는 사람의 97%가 틀렸다.
물건에는 이럴 때 쓰는 장치가 있다. 인증 마크다. 마크가 붙어 있으면 누군가 대신 확인했다는 뜻이라서, 소비자는 성분표를 읽을 줄 몰라도 마크를 보고 산다. 음악에는 그런 마크가 없다.
그렇다고 저작권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오히려 저작권은 보증서의 자리로 옮겨 가는 중이다. 2025년 11월, 워너뮤직은 AI 음악 회사 Suno를 상대로 걸었던 저작권 소송을 합의로 끝내고 계약을 맺었다. Suno는 허락받은 음악으로 학습한 새 모델을 내놓고 예전 모델은 단계적으로 접기로 했다.
이 장면이 말해 주는 게 있다. 저작권은 곡마다 붙어 있던 권리에서, AI 회사와 맺는 계약으로 모양을 바꾸고 있다. “이 모델은 허락받은 재료로 만들었다”는 말 자체가 보증서가 된다. 음악의 보증값은 곡이 아니라 공장에 붙기 시작했다.
다만 보증서도 누군가 확인해야 의미가 있다. 공장이 스스로 우리는 깨끗하다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 확인은 누가 할까.
4. 심판이자 선수
요즘 우리가 듣는 음악은 대부분 스트리밍으로 온다. 전 세계 녹음 음악 매출의 70% 가까이가 스트리밍이고, 무엇을 틀어 줄지 고르는 일은 플랫폼이 쥐고 있다.
그런데 고르는 쪽에도 이해관계가 있다. 한 탐사 보도에 따르면, 어느 큰 스트리밍 회사는 몇 년 전부터 잔잔한 배경음악 목록에 값싸게 제작한 곡을 채워 넣었다. 스무 명 남짓한 제작자가 500개 넘는 가짜 이름으로 곡을 댔고, 진짜 가수에게 갈 저작권료를 줄이려는 거라는 의혹이 일었다. AI 곡은 아니었지만 구조는 같다. 고르는 사람이 직접 만든 물건을 선반에 올린다.
처음엔 화가 났다. 그러다 쿠팡이 생각났다. 2024년, 공정거래위원회는 쿠팡에 과징금 1,628억 원을 물렸다. 자기 브랜드 상품 6만여 개를 검색 순위 위쪽으로 끌어올리고, 임직원 2,000여 명을 동원해 후기 7만여 건을 달았다는 이유였다. 쿠팡은 과징금을 내고 소송을 걸었다. 쿠팡의 말은 이랬다. 필요에 따라 상품을 추천하는 건 유통업의 본질이고, 대형마트도 잘 팔리는 자기 상품을 눈높이 선반에 둔다.
나는 이 반론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심판이 선수를 겸하는 건 예외가 아니라 유통의 기본값이다. 마트도 서점도 편의점도 다 그렇게 한다. 문제는 겸하는 데 있지 않고, 무엇이 그걸 견제하느냐에 있다.
쿠팡에는 견제가 두 개 있다. 하나는 정부다. 소송이 2년째 이어지고 있지만, 적어도 누군가 선반을 들여다보고 있다. 다른 하나는 손님이다. 쿠팡 값이 이상하면 다른 쇼핑몰을 열어 보면 된다. 비교할 수 있으니 경쟁이 심판을 감시한다.
음악에는 두 번째가 없다. 어느 곡이 사람 것이고 어느 곡이 공장 것인지 손님은 비교할 수 없다. 귀가 못 가리니까. 가릴 수 없는 물건 앞에서는 경쟁이 견제가 되지 못한다.
5. 빈자리
다시 그 장바구니로 돌아간다. 가방이 싸진 건 나쁜 일이 아니었다. 묶여 있던 정보값이 풀렸고, 사는 사람은 그만큼 덜 속게 됐다. 문제는 같이 풀려 나간 보증값이었다. 그래서 서울시는 매주 해외 직구 물건을 검사해 결과를 공개하기 시작했다. 풀린 값 하나를 누군가 다시 주워 든 셈이다.
음악도 값이 풀렸다. 제작값은 0에 가까워졌고, 저작권은 공장에 붙는 계약으로 옮겨 가는 중이다. 물건에는 인증 마크가 있고, 쿠팡에는 공정위와 값을 비교하는 손님이 있다. 그런데 음악의 보증값을 주워 들 손은 아직 없다.
그 자리는 비어 있다. 지금 그 빈자리 가장 가까이에 서 있는 건, 선반에 자기 물건도 올릴 수 있는 심판 하나뿐이다.
출처와 참고자료
공산품과 유통
- 서울특별시 (2024.4.9). 「해외 직구 어린이 제품서 56배 발암물질…유해제품 매주 공개」. 내 손안에 서울. https://mediahub.seoul.go.kr/archives/2010833
- 김아름 (2024.5.11). 「”알리보다 5배 비싸다고?”…이커머스 가격의 진실」. 비즈워치. https://v.daum.net/v/20240511130003643
- 뉴시스 (2024.10.14). 「’1628억 과징금’ 쿠팡 vs 공정위 법정다툼 내달 시작…양측 입장은」. https://www.newsis.com/view/NISX20241014_0002918847
- 연합투데이 (2024.11.21). 「’쿠팡랭킹 조작’ 1628억 과징금… 쿠팡 “진열의 자유” vs 공정위 “명백한 위계”」. https://www.yh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31493
- 한국금융신문 (2025.2.20). 「대법, ‘알고리즘 조작’ 쿠팡 공정위 시정명령 집행정지」. https://www.fntimes.com/html/view.php?ud=202502201635017930b5b890e35c_18
- 아시아경제 (2026.6.10). 「공정위, 쿠팡에 법정 최대 과징금…정보 유출도 ‘1兆 폭탄’ 현실화되나」. https://view.asiae.co.kr/article/2026061010391139983
음악 산업
- Deezer (2025.11). Deezer/Ipsos survey: AI music. https://newsroom-deezer.com/2025/11/deezer-ipsos-survey-ai-music/
- Farrell, J. (2025.11.25). Warner Music inks Suno deal amid cooling tensions over AI-generated music. SiliconANGLE. https://siliconangle.com/2025/11/25/warner-music-inks-suno-deal-amid-cooling-tensions-ai-generated-music/
- IFPI (2025). Global Music Report 2025. Music Week 보도. https://www.musicweek.com/labels/read/ifpi-global-music-report-2025-paid-streaming-lifts-the-market-but-overall-revenue-growth-slows/091626
- Renshaw, D. (2024.12.19). Report: Spotify is populating its playlists with ‘ghost artists’. The FADER(원 보도: Pelly, L., Harper’s Magazine). https://www.thefader.com/2024/12/19/report-spotify-is-populating-its-playlists-with-ghost-artists
- 심현리 (2026.8.12). 「AI음악 저작권 인정 두고 국회 ‘제동’」. MTN. https://news.mtn.co.kr/news-detail/20260811155015774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