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성취 학생은 왜 질문하지 못할까: 질문의 선행조건과 교사의 역할

3줄 직접답변

  • 질문은 단순한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이 무엇을 모르는지 구분하고 언어화할 수 있어야 가능한 능력입니다.
  • 저성취 학생은 도움이 더 필요해도 공개적으로 질문을 더 잘 요청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 교사의 질문은 정답을 대신 주기보다 사고의 순서를 외부에서 잠시 빌려주고, 그 질문이 학생의 자기질문으로 이동하게 해야 합니다.

왜 ‘모르면 질문해’가 어려울 수 있나

“모르면 질문하면 되잖아.”

교사에게는 자연스러운 말이다. 질문을 하면 설명해줄 수 있고, 학생이 어디서 막혔는지도 알 수 있다. 그래서 학생이 자기 진도대로 공부하고 교사가 돌아다니며 질문을 받아주는 수업도 개인화된 방식처럼 보인다.

그런데 저성취 학생을 오래 만나보면 먼저 확인해야 할 것이 있다.

질문을 할 수 있는가.

질문 하나에는 생각보다 많은 선행과정이 필요하다.

내가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알아야 한다. 어디서부터 막혔는지 구분해야 한다. 그 모름을 말로 표현할 수 있어야 하고, 그것을 다른 사람 앞에 드러내도 괜찮다는 느낌이 있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질문의 형태로 만들 수 있어야 한다.

아는 범위 구분 → 막힌 지점 인식 → 모름의 언어화 → 모름 공개 → 질문

저성취 학생은 이 첫 단계부터 어려울 수 있다.

문제를 읽었지만 어떤 개념이 들어 있는지 모르고, 어디에서 멈춘 것인지도 모른다. 그냥 전체가 낯설다. 그런 학생에게 “뭐가 궁금해?”라고 물으면 정말 할 말이 없을 수 있다.

여기에 이전 경험이 붙는다.

“이것도 모르니” 같은 말을 반복해서 들었거나, 같은 설명을 다시 묻는 순간 교사의 표정이 달라졌다고 느꼈거나, 뒤에서 다른 학생이 기다리는 눈치를 여러 번 봤다면 모름을 공개하는 비용은 더 커진다.

그러면 아주 쉬운 종료문장이 나온다.

“아, 알겠어요.”

실제로 이해해서가 아니라 질문을 더 이어가는 것보다 대화를 끝내는 편이 편하기 때문일 수 있다.

저성취 학생은 실제로 질문을 덜 하나

PISA 2022에서도 수학 저성취 학생 가운데 수업을 이해하지 못할 때 자주 질문한다고 답한 비율은 높지 않았고, 한국은 그 비율이 특히 낮은 국가군에 들어간다.

이 자료만으로 특정한 학원 수업형태가 저성취자를 소외시킨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적어도 도움이 더 필요한 학생이 반드시 도움을 더 잘 요청하는 것은 아니다.

교사는 어떤 질문을 먼저 빌려줄 수 있나

그래서 나는 필요한 경우 학생보다 먼저 질문한다.

학생 대신 문제를 풀기 위해서가 아니다. 학생의 머릿속에 아직 자동으로 떠오르지 않는 사고의 순서를 밖에서 잠시 만들어주기 위해서다.

저성취 학생이 중간 난도 정도의 수학 문제를 풀 때 내가 자주 사용하는 질문은 복잡하지 않다.

“지금 요구하는 게 뭐지?”

답이 없으면 더 가까이 간다.

“문제가 구하라고 한 게 뭐야?”

그다음은,

“그걸 구하려면 네가 알고 있는 것 중 뭘 써야 하지?”

그리고,

“그걸 여기 어떻게 적용하지?”

압축하면 이렇다.

**요구하는 게 뭐지?

이 요구를 위해 많은 지식 중 어떤 것을 인출해야 하지?

인출한 정보는 어떻게 적용해야 하지?**

이 질문은 정답을 찾는 기술이면서 생각의 순서다.

질문이 너무 많으면 왜 오히려 사고를 줄일 수 있나

다만 질문을 많이 한다고 좋은 수업이 되는 것은 아니다.

교사가 질문을 너무 잘게 쪼개면 학생은 아무 판단도 하지 않는다.

“여기 삼각형 보이지?”
“이 변과 이 변의 비율 같지?”
“그럼 닮음이지?”
“그러면 이 식 쓰면 되겠네?”

한 칸씩 모두 만들어주면 학생은 마지막 숫자만 적을 수 있다. 겉으로는 문답이지만 실제 사고는 교사가 했다.

따라서 질문은 학생이 다음 연결 하나를 자기 힘으로 만들 수 있을 정도까지만 움직여야 한다.

어떤 날은 “뭘 구하래?” 한마디면 충분하다. 어떤 날은 조건을 다시 읽게 해야 하고, 어떤 날은 이전에 배운 개념을 거의 처음부터 꺼내야 한다.

개별 학생의 이해를 연구가 대신 판단할 수 있나

이 지점은 일반 연구가 개별 학생 대신 결정하기 어렵다.

나는 학생의 표정, 대답의 속도, 다음 문제의 반응을 보며 이해가 실제로 일어났는지 판단한다. 그 판단이 항상 맞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알겠어요”라는 한 문장을 최종판정으로 사용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학습이 계단식이라면 무엇이 달라지나

질문을 반복해서 되돌려주는 이유도 있다. 학습이 매번 선형으로 늘지는 않기 때문이다.

한 개념을 이해한다.

다른 문제에서 비슷한 구조를 본다.

틀린다.

다시 설명을 듣는다.

다음 문제에서 또 막힌다.

그러다 어느 순간 이전에는 못 풀던 수준을 혼자 처리한다.

학생 자신도 언제 연결됐는지 모를 수 있다.

나는 이런 말을 자주 한다.

“선형적이 아니라 계단이야.”

한동안 겉으로 큰 변화가 없어도 여러 조각이 쌓이고 있을 수 있다. 그래서 오늘 연결되지 않은 지점을 기억해뒀다가 다른 날 다시 꺼내보는 일이 필요하다.

기다린다는 것은 방치한다는 뜻이 아니다. 지금 어디가 연결되지 않았는지 보고, 다음에 무엇을 확인할지 기억하고, 필요할 때 다시 질문하는 것이다.

왜 솔직해도 되는 환경이 먼저 필요한가

이 과정이 가능하려면 한 가지 조건이 더 필요하다.

솔직해도 되는 환경이 먼저다.

학생에게 “모르면 모른다고 해”라고 요구하기 전에, 모른다고 말했을 때 무엇이 돌아오는지를 봐야 한다.

모름을 공개했을 때 짜증과 비난이 돌아오면 학생은 곧 배운다. 모르면 숨기는 편이 낫다는 것을.

반대로,

“여기까지는 알고 여기서 막힌 거네.”
“괜찮아. 지금 모르는 거야.”
“그럼 이것부터 다시 보자.”

라는 반응이 반복되면 모름은 부끄러움이 아니라 학습정보가 될 수 있다.

그래서 내가 중요하게 두는 문장이 있다.

모르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지금 모를 뿐이다.

이 말은 자존감을 높이기 위한 위로가 아니다. 지금 모른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드러낼 수 있어야 다음 질문이 생기기 때문이다.

교사의 질문은 어떻게 자기질문이 되는가

그리고 그 질문은 결국 학생의 것이 되어야 한다.

나는 학생들에게 자주 말한다.

“내가 네게 하는 질문을 네가 스스로 하게 될 때, 수학을 잘하게 될 거야.”

처음에는 내가 묻는다.

“뭘 구하지?”
“뭘 꺼내야 하지?”
“왜 그걸 쓰지?”

그러다 어느 순간 내가 묻기 전에 학생이 스스로 멈춘다.

“잠깐, 이거 뭐 구하라고 했지?”

그 순간 공부의 구조가 조금 달라진다.

교사의 질문은 학생 대신 사고하기 위한 장치가 아니다. 학생이 언젠가 자기 안에서 던질 질문의 형태를 잠시 빌려주는 일이다.

그리고 그 질문을 따라가며 학생이 이전에는 못 풀던 문제 하나를 자기 힘으로 처리하게 되는 순간, 다음 변화가 시작된다.

그 한 문제는 정말 한 문제일 뿐일까.

참고 자료

댓글 달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